[진행자] 오늘은 10월 20일입니다. 오늘 ‘역사 속 오늘’에서는 호주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공식 개관한 날을 돌아봅니다. 또 냉전 초기 미국 의회가 할리우드 영화계의 공산주의 영향력을 조사하기 위해 공개 청문회를 시작한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Sydney Opera House Officially Opens — 1973년 10월 20일
[진행자] 첫 번째 이야기는 호주의 대표적인 명소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1973년 오늘 공식 개관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날 호주 시드니항에 자리 잡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공식 개관했습니다. 개관식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필립 공이 참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개관을 선언했고, 시드니항 주변에서는 불꽃놀이와 축하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도 연주됐습니다. 흰색 돛을 여러 개 펼쳐 놓은 듯한 독특한 지붕으로 유명한 이 건물은 이후 시드니를 넘어 호주 전체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진행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인데요, 처음부터 이런 독특한 모습으로 설계된 겁니까?
[기자] 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설계자는 덴마크 출신 건축가 예른 웃손입니다. 1950년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정부는 시드니에 새로운 공연장을 건설하기 위해 국제 설계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웃손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돛이나 조개껍데기를 연상시키는 지붕을 제안했고, 1957년 그의 설계안이 당선됐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디자인이었습니다. 특히 곡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붕을 실제로 건설하는 것이 큰 기술적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독특한 설계가 훗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세계적인 건축물로 만든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됐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이 건물을 짓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죠?
[기자] 그렇습니다. 공사는 1959년 3월 시작됐지만, 공식 개관까지 14년 넘게 걸렸습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공사 기간이 크게 늘어난 겁니다.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복잡한 지붕 구조였습니다. 당시의 건축 기술로는 웃손이 구상한 곡면 지붕을 구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설계를 수정하고 구조를 계산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에 공사비 증가와 정치적 논쟁도 이어졌습니다. 처음 예상했던 건설 비용은 현재의 호주 달러 단위로 환산하면 약 700만 달러였지만, 최종 비용은 약 1억 200만 호주 달러까지 늘어났습니다.
[진행자] 설계자인 웃손도 공사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웃손은 공사 과정에서 정부와 건설 비용, 설계 변경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결국 1966년 프로젝트에서 물러났습니다. 당시 건물의 외부 구조는 상당 부분 완성된 상태였지만, 내부 공간과 공연시설 등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호주 건축가들이 남은 설계와 공사를 이어받아 건물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웃손은 1973년 공식 개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순간에 현장에 없었던 겁니다.
[진행자] 오늘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도 인정받고 있죠?
[기자] 맞습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20세기에 건설된 건축물 가운데 독창적인 디자인과 기술적 성취를 인정받은 사례입니다. 특히 건축가 웃손이 구상한 독특한 지붕은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2. HUAC Begins Hollywood Hearings — 1947년 10월 20일
[진행자] 두 번째 이야기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와 관련된 사건이군요. 1947년 오늘, 미국 의회가 공산주의 영향력을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시작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미국 하원 비미활동위원회, 영어 약칭으로 HUAC가 할리우드 영화산업에 공산주의가 침투했는지를 조사하기 위한 공개 청문회를 시작했습니다. 장소는 수도 워싱턴 D.C.였습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냉전이 본격화되고 있었고, 미국 사회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의회는 특히 영화가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매체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영화 제작자와 배우, 작가들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이 있는지, 또 영화 내용에 정치적 메시지가 반영되고 있는지를 조사하려 한 겁니다.
[진행자] 당시 의회가 특별히 할리우드 영화계를 조사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있었습니까?
[기자] 당시 할리우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영화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영화는 수많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매체였는데요. 일부 의원들은 공산주의 성향의 영화인들이 영화 제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반면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조사가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반발도 나왔습니다. 결국 청문회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에 대한 조사인 동시에 국가안보와 개인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진행자] 청문회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도 증인으로 출석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청문회 첫날인 10월 20일에는 워너브러더스의 잭 워너와 MGM의 루이스 B. 메이어 등 주요 영화사 관계자들이 증언했습니다. 작가 아인 랜드도 이날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이후에는 배우와 감독, 작가 등 여러 영화계 인사들이 출석했습니다. 특히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도 증언했습니다. 당시 레이건은 영화배우이자 미국 배우조합 회장이었는데요. 10월 23일 청문회에 출석해 영화계의 공산주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24일에는 애니메이션 제작자 월트 디즈니도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청문회에 출석한 영화인들 가운데 의회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죠?
[기자] 맞습니다. 일부 영화계 인사들은 위원회가 공산당 가입 여부 등을 묻는 것에 반발했습니다. 특히 작가와 감독 등 10명은 헌법 수정 제1조에 따른 권리를 주장하며 위원회의 질문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고, 공산당 가입 여부 등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이후 '할리우드 10인'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의회모독 절차를 추진했고, 이들은 이후 법원에서 의회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형을 복역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의회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한 데 따른 의회모독죄로 처벌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진행자] 이 사건이 이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1947년 11월 25일, 미국 주요 영화사 경영진들은 이른바 '월도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의회모독 혐의로 지목된 영화인들을 해고하거나 고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받은 작가와 배우, 감독들이 영화계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이른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입니다.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5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미국 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진행자] 결국 이 청문회는 미국 냉전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남게 됐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1947년 할리우드 청문회는 냉전 초기 미국 사회에 확산된 공산주의에 대한 우려와 그에 따른 정치적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당시 의회는 국가안보와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 조사를 강조했지만, 조사 방식과 블랙리스트는 개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진행자] 세계적인 건축물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공식 개관한 1973년 10월 20일, 그리고 미국 의회가 할리우드 영화계의 공산주의 영향력을 조사하기 위한 공개 청문회를 시작한 1947년 10월 20일. 역사 속 오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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