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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예거, 최초의 유인 초음속 비행 성공…마틴 루서 킹 목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천장에 스페이스쉽원(왼쪽)이 척 예거의 벨 X-1(배경의 주황색 비행기)과 X-15(전면) 사이에 걸려 있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천장에 스페이스쉽원(왼쪽)이 척 예거의 벨 X-1(배경의 주황색 비행기)과 X-15(전면) 사이에 걸려 있다.

[진행자] 오늘은 10월 14일입니다. 오늘 ‘역사 속 오늘’에서는 1947년 미국의 시험비행사 척 예거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유인 초음속 비행에 성공한 사건을 살펴봅니다. 이어 1964년 미국의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 Chuck Yeager Breaks the Sound Barrier — 1947년 10월 14일

[진행자] 첫 번째 소식입니다. 1947년 10월 14일, 미국의 시험비행사 척 예거가 비행기를 타고 음속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에는 음속을 넘어 비행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당시 항공기 개발자들은 비행기가 소리의 속도에 가까워질 때 발생하는 공기 흐름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비행 속도가 높아지면서 충격파가 발생하고, 기체에 강한 진동이 생기거나 조종 성능이 떨어지는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특히 비행기의 자세를 조절하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문제였습니다.

[진행자] 척 예거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기자] 척 예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시험비행사로 활동했는데요. 1947년에는 당시 미 공군 대위였던 예거가 실험용 항공기 비행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조종한 비행기는 벨 항공사가 제작한 X-1이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일반적인 여객기나 전투기와는 달리 고속 비행 연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로켓 추진 항공기였습니다.

[진행자] 당시 비행기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기자] X-1은 선명한 주황색으로 칠해진 작은 항공기였습니다. 동체는 고속 비행에 적합하도록 설계됐고,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척 예거는 이 비행기에 자신의 아내 이름을 따서 '글래머러스 글레니스'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X-1은 지상 활주로에서 직접 이륙하지 않았습니다. B-29 폭격기에 실려 높은 고도까지 올라간 뒤 공중에서 분리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로켓 연료를 아끼면서 높은 속도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역사적인 비행을 앞두고 척 예거가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기자] 맞습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와 척 예거 재단의 기록에 따르면 예거는 비행을 며칠 앞두고 말을 타다가 떨어져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하지만 비행 임무에서 제외될 것을 우려해 부상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부상 때문에 X-1 조종석의 출입문을 잠그는 장치를 제대로 조작하기 어려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자 동료 시험비행사 잭 리들리가 빗자루 손잡이를 잘라 임시 지렛대를 만들어 줬습니다. 예거는 이 도구를 이용해 조종석 문을 잠그고 비행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 그렇게 시작된 비행에서 실제로 음속을 넘어선 겁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1947년 10월 14일,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의 뮤록 비행장 상공에서 B-29 폭격기가 X-1을 공중에 분리했습니다. 예거는 로켓 엔진을 작동시켜 속도를 높였고, 고도 약 4만 3천 피트, 약 13킬로미터에서 마하 1.06에 도달했습니다. 시속 약 1천127킬로미터에 해당합니다. 이 비행으로 예거는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최초의 유인 초음속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2. Martin Luther King Jr. Is Named Nobel Peace Prize Laureate — 1964년 10월 14일

[진행자] 두 번째 소식입니다. 이번에는 1964년 10월 14일로 가 보겠습니다. 이날 미국의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당시 킹 목사의 나이가 35세였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당시 35세로, 그때까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물 가운데 가장 젊었습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맞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투쟁해 온 공로를 인정해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투표권과 교육, 공공시설 이용 등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킹 목사는 수상 소식을 조금 특별한 장소에서 들었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마틴 루서 킹 연구소 기록에 따르면 킹 목사는 당시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민권운동을 이끌면서 피로가 누적돼 건강검진과 휴식을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요. 10월 14일 아침, 아내 코레타 스콧 킹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자신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킹 목사는 이후 자신의 회고에서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소식이 꿈인지 현실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습니다.

[진행자] 킹 목사는 이미 당시 미국에서 잘 알려진 민권운동 지도자였죠?

[기자] 그렇습니다. 킹 목사가 전국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시작된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었습니다.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뒤 체포되면서 흑인 주민들의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젊은 목사였던 킹은 이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약 1년 동안 이어진 운동은 버스 내 인종 분리 제도를 위헌으로 판단한 연방법원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유지되면서 제도 폐지로 이어졌습니다.

[진행자] 킹 목사의 민권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비폭력 저항이었죠?

[기자] 맞습니다. 킹 목사는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에 맞서면서도 폭력 대신 평화적인 시위와 행진, 시민 불복종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1963년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진행된 민권운동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킹 목사는 같은 해 워싱턴에서도 대규모 민권운동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진행자] 바로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이 나온 집회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에서 열린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대행진에서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인종에 따른 차별이 없는 미국 사회를 향한 자신의 희망을 밝혔습니다. 이 연설은 미국 민권운동을 상징하는 연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진행자] 실제 노벨 평화상 시상식은 언제 열렸습니까?

[기자] 수상자 발표 약 두 달 뒤인 1964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렸습니다. 킹 목사는 이 자리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상 연설에서 미국의 민권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유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혔습니다.

[진행자] 미국의 시험비행사 척 예거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유인 초음속 비행에 성공한 1947년 10월 14일, 그리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1964년 10월 14일. 역사 속 오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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