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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아메리카 250] 미국 독립전쟁의 승부를 바꾼 요크타운 전투

왕립 포병대 자원봉사자 팀이 요크타운에서 6파운드 황동 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사진 =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왕립 포병대 자원봉사자 팀이 요크타운에서 6파운드 황동 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사진 =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미국 역사 이야기, ‘역사 속 아메리카 250’입니다. 오늘은 미국 독립전쟁의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자, 사실상 독립을 확정 지었던 현장으로 떠나봅니다. 바로 1781년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 이야기입니다. 조진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요크타운 전투는 미국 독립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최대 승부처로 평가받는데요. 당시 대륙군과 영국군의 정세는 어떠했습니까?

기자: 1781년 당시 미국 독립전쟁은 6년 넘게 이어지며 양측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소모전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장군의 영국 주력군은 오늘 이야기 주제인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 진을 치고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는데요. 바다를 통해 영국 본국이나 뉴욕의 지원군으로부터 물자와 병력을 보급받아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을 간파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총사령관은 프랑스 연합군과 함께 남쪽으로 비밀리에 이동해 영국군을 기습 포위하는 대담한 작전을 구상하게 됩니다.

진행자: 당시에 프랑스의 전격적인 군사 지원이 승리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 연합군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나요?

기자: 프랑스의 전폭적인 가세가 없었다면 요크타운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만큼 핵심적이었습니다. 육상에서는 로샹보(Comte de Rochambeau)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 5천여 명이 워싱턴의 대륙군과 합류하여 요크타운을 향해 신속하게 남하했습니다. 바다에서는 그라스(Comte de Grasse)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 함대가 체서피크만 해전에서 영국 함대를 격퇴하며 앞바다를 완벽히 차단했습니다. 이로써 퇴로와 보급이 모두 막힌 영국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완벽히 포위되는 처지가 됐습니다.

진행자: 육지와 바다가 모두 막힌 포위망 속에서, 연합군의 포위 공격은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기자: 1781년 9월 말부터 포위망이 조여졌고, 10월 9일부터는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대포 포격이 밤낮없이 퍼부어졌습니다. 요크타운 내부의 영국군 진지는 점차 잿더미로 변해갔는데요. 연합군은 요새 주위에 참호를 파 들어가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고, 영국군은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고립 상태에서 병력과 물자가 고갈되어 갔습니다.

진행자: 포위전 중에서도 승패를 완전히 갈라놓았던 결정적인 순간이나 돌파구가 있었습니까?

기자: 10월 14일 밤에 펼쳐진 기습 작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영국군의 핵심 외곽 방어선이었던 9번과 10번 요새를 동시에 타격한 것인데요. 특히 10번 요새 공격을 맡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중령의 미군은 기습이 누설되지 않도록 총에 탄약을 넣지 않고, 오직 총검만 착용한 채 캄캄한 밤을 이용해 기습 침투했습니다. 치열한 육탄전 끝에 불과 10여 분 만에 요새를 점령하면서 영국군의 방어선은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진행자: 주요 방어선까지 뚫리면서 결국 영국군이 항복을 선언하게 되는데요. 항복 조건은 어디에서 논의됐습니까?

기자: 요크타운 외곽에 있는 무어하우스(The Moore House)라는 주택입니다. 10월 18일, 미국과 프랑스, 영국 측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항복 조건을 협상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19일,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지난 10월 19일은 독립전쟁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은 지 24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사들은 미군과 프랑스군이 양쪽에 늘어선 가운데 나와 무기를 반납했습니다. 이 항복은 독립전쟁에서 영국군에 큰 타격을 안겼고, 영국이 미국 식민지들을 다시 장악할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지게 했습니다.

진행자: 당시 항복식 과정에서도 양측 간에 묘한 자존심 싸움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기자: 그렇습니다. 영국군의 콘월리스 장군이 식민지 민병대에게 패배했다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당일 병을 핑계로 항복식장에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신 부사령관인 찰스 오하라 장군을 보내 항복검을 전달하려 하자, 조지 워싱턴 장군 역시 격을 맞추기 위해 벤저민 링컨(Benjamin Lincoln) 장군을 내세워 항복검을 받도록 했습니다.

진행자: 요크타운 전투에서의 패배 소식을 접한 영국 본국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기자: 요크타운에서의 참패 소식이 영국 런던에 전해지자, 당시 영국 총리였던 프레더릭 노스 경은 "오, 하나님,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라고 외쳤을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식민지 반란을 제압할 수 있다는 영국의 기대가 산산조각 난 순간이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이번 요크타운 전투의 승리가 오늘날 미국의 탄생과 역사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자: 요크타운 전투는 6년 넘게 이어진 미국 독립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이 패배로 영국 의회와 조정은 전쟁을 계속 수행할 정치적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고, 결국 2년 뒤인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완전한 독립을 공식 승인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열세였던 식민지 민병대가 동맹국과의 단합된 전략으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대영제국을 꺾고 오늘날 미국이라는 나라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진행자: 굳건한 연대와 치밀한 전략으로 자유와 독립을 이뤄낸 요크타운 전투 이야기, 조진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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