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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아메리카 250]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

20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
20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미국 역사 이야기, ‘역사 속 아메리카 250’입니다. 오늘은 가난한 농가에서 성장해 학자와 군인, 정치인을 거쳐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20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를 만나봅니다. 조진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가운데서도 재임 기간이 매우 짧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기자: 가필드는 1831년 오하이오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두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오하이오주 운하에서 배를 끄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운하에서는 말이나 사람이 배를 끌어 이동시키곤 했는데요. 가필드도 이런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습니다. 여러 학교에서 공부한 뒤 매사추세츠주의 윌리엄스 칼리지에 진학했고, 1856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 오하이오로 돌아와 교사로 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공부했던 학교의 교장까지 맡았습니다.

진행자: 가난한 집안에서 출발해 교육자가 됐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요. 이후에는 군인으로도 활약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가필드는 북부 연방군에 합류했습니다. 1862년 켄터키주에서 남부군을 상대로 전투를 지휘했고, 이후 소장까지 승진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가필드는 군 복무에만 머물기보다 의회에서 전쟁 수행과 전후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책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오하이오의 정치적 동료들이 그에게 연방 하원의원 출마를 권했고, 1862년 공화당 후보로 지명돼 선거에서 당선됐습니다.

가필드는 군을 떠나 의회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약 17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진행자: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떤 문제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나요?

기자: 가필드는 의회에서 정부 예산과 재정 문제를 다루는 한편, 공직 인사 제도를 개선하는 데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미국 정치에서는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도운 사람이나 정치적 후원자에게 공직을 나눠 주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능력보다 정치적 연줄이 공직 임용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았던 건데요. 가필드는 이런 정실 인사 관행을 개선하고, 공직자를 능력과 자격에 따라 선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중요한 개혁 과제로 이어졌습니다.

진행자: 그러다 어떻게 대통령 후보가 된 건가요? 처음부터 유력한 후보였습니까?

기자: 처음부터 대통령 후보로 주목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18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려면 대의원 투표에서 과반인 379표를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전 대통령과 제임스 블레인(James G. Blaine) 상원의원, 재무장관을 지낸 존 셔먼(John Sherman) 등 주요 후보들에게 표가 나뉘면서 어느 누구도 필요한 표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투표가 35차례나 이어진 끝에 후보들 사이에서 지지표가 이동했고, 결국 36번째 투표에서 가필드가 399표를 얻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가필드는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 윈필드 스콧 핸콕(Winfield Scott Hancock)을 꺾고 당선됐습니다. 1881년 3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미국의 20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대통령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취임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총격을 당했죠?

기자: 그렇습니다. 1881년 7월 2일, 가필드는 워싱턴의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철도역에서 총격을 당했습니다. 범인은 찰스 기토(Charles Guiteau)라는 남성이었습니다. 기토는 자신이 가필드의 대통령 당선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했고, 외국 공사직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자리를 받지 못하자 대통령에게 앙심을 품고 총을 쐈습니다. 가필드는 총격 직후 곧바로 숨지지 않았습니다. 백악관에서 치료를 받으며 두 달 넘게 생사를 오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의료 기술과 감염 관리 수준은 오늘날과 크게 달랐습니다. 의사들은 총알의 위치를 찾으려고 상처를 여러 차례 살폈지만, 총알을 제거하지 못했고 감염도 심해졌습니다.

진행자: 당시에는 총알을 찾기 위해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까지 나섰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전화 발명가로 잘 알려진 벨은 금속 물체를 탐지하는 전기 장치를 만들어 총알의 위치를 찾으려 했습니다. 오늘날 금속 탐지 기술의 초기 형태와 비슷한 원리를 활용한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탐지 장치는 총알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누워 있던 침대에 금속 스프링이 들어 있었던 점도 탐지를 어렵게 한 요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필드는 결국 총격을 당한 지 79일 만인 1881년 9월 19일, 뉴저지주 엘버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통령 재임 기간은 약 6개월 반에 그쳤습니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에 이어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짧은 대통령 재임 기록입니다.

진행자: 가필드의 죽음이 이후 미국 정치에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기자: 가필드가 숨진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인물은 부통령 체스터 A. 아서(Chester A. Arthur)였습니다. 아서는 당초 정치적 후원자에게 공직을 배분하는 정실 인사 체제와 관련이 있었지만, 가필드 암살 이후 커진 개혁 요구에 대응했습니다. 그 결과 1883년 공직 임용에 경쟁시험을 도입하는 등 연방 공무원 제도를 개혁한 ‘펜들턴 공무원 개혁법’이 제정됐습니다. 가필드의 죽음이 공직 인사 제도를 바꾸려는 여론을 키운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진행자: 가난한 농가에서 출발해 대통령이 됐지만, 임기를 마치지 못한 20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 이야기, 조진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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