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서 생포된 체 게바라…세계 최초 완전 이식형 심박조율기

쿠바 아바나에서 한 남성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자료사진)

[진행자] 오늘은 10월 8일입니다. 오늘 ‘역사 속 오늘’은 1967년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이었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군에 생포된 날로 돌아가 봅니다. 이어 1958년,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지 못하던 한 환자에게 세계 최초의 완전 이식형 심박조율기가 이식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1. Che Guevara Captured by Bolivian Troops — 1967년 10월 8일

[진행자] 첫 번째 소식입니다. 1967년 10월 8일,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이었던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생포됐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이날 볼리비아군 제2 레인저 대대가 볼리비아 남동부에서 체 게바라가 이끌던 게릴라 부대와 교전을 벌였습니다. 미 정부 기록에 따르면 게바라는 이 과정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로 붙잡혔습니다. 볼리비아군은 그를 인근 라 이게라 마을의 작은 학교 건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9일, 게바라는 이곳에서 처형됩니다.

[진행자] 체 게바라라고 하면 쿠바 혁명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가 어떻게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이 된 겁니까?

[기자]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입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했고, 젊은 시절 중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이후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무장투쟁에 합류했습니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새 정부에서 여러 고위직을 맡았는데요. 하지만 게바라는 쿠바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도 무장혁명을 확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왜 하필 볼리비아였습니까?

[기자] 게바라는 볼리비아를 거점으로 무장 게릴라 운동을 다른 중남미 지역으로 확산하려 했습니다. 위장 신분으로 볼리비아에 들어간 뒤 현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했는데요. 하지만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현지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볼리비아 공산당과도 갈등을 겪었습니다. 정부군의 압박이 강해지는 가운데 병력과 보급도 줄어들면서 게바라의 부대는 점차 고립됐습니다.

[진행자] 체 게바라의 체포를 이야기할 때 미국과 CIA의 역할도 자주 언급되는데요. 미국은 어느 정도 관여했던 겁니까?

[기자] 미국이 볼리비아 정부의 대게릴라 작전을 지원한 것은 미 정부 기록에서도 확인됩니다. 미국은 1967년 볼리비아군 제2 레인저 대대의 훈련과 장비를 지원했고, 미 육군 특수부대인 그린베레 훈련팀도 참여했습니다. 미국은 정보와 기술 지원도 제공했고, 미 정부 기록에 따르면 CIA 계약 인력도 볼리비아군에 고문으로 배치됐습니다. 다만 10월 8일 게바라와 직접 교전해 그를 생포한 것은 볼리비아군 제2 레인저 대대였습니다.

[진행자] 그리고 생포된 바로 다음 날 처형됐죠?

[기자] 그렇습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장 리처드 헬름스가 작성한 메모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볼리비아 육군본부에서 게바라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이날 오후 명령이 집행됐습니다. 볼리비아 정부는 당초 게바라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이후 공개된 미 정부 기록은 그가 살아 있는 상태로 생포된 뒤 처형됐음을 보여줍니다.

[진행자] 그런데 체 게바라는 사망한 뒤에도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로 남았죠?

[기자] 그렇습니다. 게바라의 죽음은 그가 볼리비아를 거점으로 추진했던 무장 게릴라 운동을 사실상 끝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는 이후 세계 여러 지역에서 혁명과 저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널리 사용됐습니다. 특히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촬영한 게바라의 얼굴은 포스터와 깃발, 의류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20세기의 대표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반면 게바라가 쿠바 혁명 이후 새 정부에서 맡았던 역할과 처형, 무장혁명에 대한 입장 등을 둘러싼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엇갈립니다.

2. The First Fully Implantable Pacemaker Is Implanted — 1958년 10월 8일

[진행자] 두 번째 소식입니다. 이번에는 1958년 스웨덴으로 가보겠습니다. 이날 세계 최초로 완전히 몸 안에 넣는 심박조율기가 환자에게 이식됐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1958년 10월 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심장외과 의사 오케 세닝이 룬 엘름크비스트가 개발한 심박조율기를 43살의 엔지니어 아르네 라르손에게 이식했습니다. 이전에도 몸 밖에서 전기 자극을 이용해 심장 박동을 조절하는 장치는 있었지만, 전원과 장치를 모두 몸 안에 넣는 완전 이식형 심박조율기가 사람에게 이식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진행자] 이 환자는 당시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던 겁니까?

[기자]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라르손은 심장의 전기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완전 방실차단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심장이 지나치게 느리게 뛰면서 갑자기 의식을 잃는 이른바 스톡스-애덤스 발작을 반복했는데요. 당시 의학 기록에 따르면 수술 전에는 하루에 20번에서 30번까지 발작을 일으켰고 반복적으로 소생술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이 최초의 심박조율기 탄생에는 환자의 아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라르손의 아내 엘스 마리는 전기 자극을 이용한 심장 치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의료진에게 남편을 살릴 방법을 찾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했습니다. 당시 세닝과 엘름크비스트는 완전 이식형 장치의 실험을 아직 마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거듭된 요청 끝에 의료진은 사람에게 사용할 장치를 급히 준비했고 10월 8일 저녁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진행자] 최초의 장치라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심박조율기와는 상당히 달랐겠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당시 장치는 충전식 니켈카드뮴 배터리를 사용했고 피부 바깥에서 전자기 유도 방식으로 충전해야 했습니다. 의료진은 가슴을 열어 전극을 심장 근육에 직접 연결했고, 심박조율기 본체는 복벽에 넣었습니다. 장치는 일정한 전기 자극을 보내 심장이 계속 뛰도록 했는데요. 오늘날처럼 환자의 심장 상태를 감지하고 필요할 때 정교하게 작동하는 심박조율기와 비교하면 매우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첫 번째 심박조율기는 오래 작동하지 못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최초로 이식한 심박조율기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작동을 멈췄습니다. 의료진은 다음 날 두 번째 장치를 다시 이식했는데요. 이 장치 역시 오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성공적인 출발이라고 말하기 어려웠지만, 몸 안에 이식한 장치가 전기 자극을 통해 사람의 심장 박동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 환자에게서 보여줬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이후 배터리와 전자회로, 전극 기술이 발전하면서 심박조율기는 점차 신뢰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최초의 환자였던 라르손은 어떻게 됐습니까?

[기자] 라르손은 이후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새로운 심박조율기로 교체하면서 살았습니다. 의학 자료에 따르면 그는 남은 43년 동안 20개가 넘는 심박조율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8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초의 심박조율기는 몇 시간밖에 작동하지 못했지만, 최초의 환자는 이후 40년 넘게 살아간 겁니다.

[진행자]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정부군에 생포된 1967년 10월 8일, 그리고 생명이 위태롭던 한 환자에게 세계 최초의 완전 이식형 심박조율기가 이식된 1958년 10월 8일. 역사 속 오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