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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아메리카 250] 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

21대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
21대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미국 역사 이야기, ‘역사 속 아메리카 250’입니다. 조진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오늘은 21대 미국 대통령을 만나보겠습니다.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인데요.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정치적 인맥을 중시하는 인물로 알려졌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공무원 개혁을 추진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체스터 A. 아서는 1881년부터 1885년까지 미국의 제21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의 정치 인생은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정치적 인맥과 정당의 영향력을 활용해 성장했지만, 백악관에 들어간 뒤에는 오히려 공직 사회의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아서는 1829년 버몬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교사로 일했고, 이후 변호사가 돼 뉴욕에서 활동했습니다. 남북전쟁 때는 뉴욕주 민병대에서 군수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화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당시 뉴욕 정계를 장악했던 정치 실력자 로스코 콘클링(Roscoe Conkling)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진행자: 정치적 인맥이 그의 출세에 중요한 역할을 했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기자: 아서는 1871년 제18대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 때 뉴욕항 세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당시 뉴욕항은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거두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세관장은 막대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고, 아서는 이곳에서 약 1천 명이 넘는 직원을 관리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미국 정치에 정실주의, 즉 정당에 대한 충성이나 정치적 인맥을 바탕으로 공직을 나누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서 역시 이런 정치 체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습니다. 1877년 취임한 제19대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공직 사회의 부패와 정실주의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뉴욕항 세관도 조사 대상이 됐고, 인사와 운영에서 정치적 편향과 비효율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아서는 1878년 세관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진행자: 그런 인물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고, 또 개혁에 나서게 된 겁니까?

기자: 18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서는 공화당의 제임스 가필드 후보와 함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당내 정치 세력 간 타협의 성격이 강한 인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81년 7월, 가필드 대통령이 총격을 당했습니다. 가필드는 두 달 넘게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그해 9월 19일에 사망했고요. 부통령이었던 아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서가 기존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된 뒤 정당의 인사 청탁과 정치적 후원에 좌우되는 공직 문화를 바꾸는 데 힘을 실었습니다.

진행자: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공무원 개혁법이라고요?

기자: 맞습니다. 1883년 1월 16일, 아서 대통령은 ‘펜들턴 공무원 개혁법’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은 일부 연방 공무원을 채용할 때 정치적 인맥이나 정당에 대한 충성보다 능력과 경쟁시험을 중시하도록 했습니다. 또 법의 적용을 받는 공무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해고하거나 강등하는 것을 제한하고, 공무원에게 정당 정치자금을 강제로 내도록 하는 관행도 금지했습니다. 이 법은 미국 연방 공무원 제도가 능력 중심으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당시 모든 공무원에게 경쟁시험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고, 개혁도 점진적으로 확대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서가 바로 그 정실주의 정치의 수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정치적 인맥을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그 관행을 바꾸는 법안에 서명한 겁니다.

진행자: 그런데 아서 대통령의 정책이 모두 개혁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민 정책에서는 오늘날에도 논쟁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아서 대통령은 1882년 중국인 이민을 제한하는 법안의 첫 번째 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20년 동안 금지하려는 내용 등이 기존 조약과 충돌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정된 법안에는 결국 서명했습니다. 이 법은 중국인 노동자의 미국 이민을 10년 동안 중단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따라서 아서 대통령은 공무원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면서도, 특정 집단의 이민을 제한하는 정책에 동의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진행자: 백악관에서의 생활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고요?

기자: 네. 아서 대통령은 옷차림과 실내 장식에 관심이 많은 세련된 취향의 소유자로 알려졌습니다. 대통령이 됐을 때 백악관의 실내 장식과 가구가 낡았다고 판단해 대대적인 정비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유명한 장식가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도 백악관 개조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또 아서는 대통령 취임 당시 아내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아내 엘런이 1880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백악관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와 접대는 여동생 메리 아서 맥엘로이(Mary Arthur McElroy)가 맡았습니다.

진행자: 아서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하지 못하고 백악관을 떠났는데요.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습니까?

기자: 네, 아서 대통령은 188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했고, 1885년 임기를 마쳤습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뉴욕으로 돌아갔지만, 건강이 악화돼 1886년 11월 18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임 중 공무원 개혁을 추진해 미국 행정 제도의 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중국인 이민 제한법에 서명했기 때문에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적 인맥으로 출세한 인물이 대통령이 된 뒤 공직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체스터 A. 아서는 미국 정치사에서 예상 밖의 변화를 보여준 대통령으로 기억됩니다.

진행자: 네, 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 이야기, 조진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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