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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안창호 (1) 점진학교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안창호 (1) 점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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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창호 첫 번째 시간으로 그가 대한제국에서 점진학교를 세우고 미국에 건너가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창호 첫 번째 시간으로 그가 대한제국에서 점진학교를 세우고 미국에 건너가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도산 안창호는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의 고비마다 활로를 개척한 지도자로 평가됩니다.

특히 그는 이민 초기 황량한 불모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하나로 결집해 독립운동 최대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한국 교원대학의 김도훈 교수는 미주 한인사에서 안창호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녹취: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 “우리가 흔히 미주 한인의 3대 지도라고 하면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선생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1875년생이고 안창호는 세 살 어리고 박용만은 안창호 선생보다 세 살 어려요. 그러니까 세 살 터울, 세 살 터울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안창호 선생은 1938년에 옥중에서 돌아가시고 박용만 선생도 1928년에 돌아가세요. 그러니까 이승만이 뒤에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까지 할 만큼 오래 살았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르면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도롱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자주 이사를 다녔습니다. 게다가 11세 때는 아버지가 작고해 이후 할아버지 밑에서 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창호가 서당에 출입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4세가 되던 무렵입니다. 그는 이 시기 서너 살 연상인 필대은이라는 사람, 그리고 당시 조선 서북 지역에서 기독교를 전하던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안창호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에 민노아학당에 들어갔습니다.

민노아학당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가 세운 학교로 안창호는 이곳에서 속성으로 1년 과정을 마친 뒤 조교를 맡았습니다.

이 무렵 필대은도 서울로 올라왔는데요. 두 사람은 1897년 독립협회에 들어가 개화, 개혁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안창호 연구가인 한국 국민대학교의 장석흥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안창호’에서 이 시기 안창호가 청년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창호와 필대은은 특히 독립협회 평양지회 설립에 앞장섰는데요. 1898년 여름 관서 지역을 총괄하는 평양지회가 설립됐습니다.

그런데 안창호는 이해 독립협회 평양지회가 주최한 연설에서 명연설로 다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 연설이 바로 쾌재정 연설입니다.

장석흥 교수에 따르면 안창호는 이해 음력 7월 25일 평양관찰사 등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낭독: 안창호]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것은 말뿐입니다. 백성들은 감무에 구름 바라듯이 잘 살게 해주기를 쳐다보는데, 인모 탕건을 쓴 대관‧소관들은 내려와서 여기저기 쑥덕거리고 안부 인사만 보내니, 죽는 것은 애매한 백성뿐이 아닙니까. 안부 인사를 받은 사람은 당장에 돈을 싸 보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있다고 하여 주리를 틀고 돈을 빼앗으니, 이런 학정이 또 어디 있습니까. 뺏은 돈으로 허구한 날 선화당에 기생을 불러 풍악 잡히고 연광정에 놀이만 다니니, 이래서야 어디 나라 꼴이 되겠습니까. (출처-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안창호 /장석흥 지음)

관리들의 부패를 낱낱이 고발하는 이 연설은 폭정에 시달린 농민들을 대변했을 뿐만 아니라 고위 관리들을 시원하게 질타해 청중들의 한 맺힌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연설 이후 안창호는 대한제국 전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사실 청년 시절 안창호의 꿈은 교육자였습니다.

안창호는 훗날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특히 나라 잃은 민족이 해야 할 6대 사업을 제시하면서 군사, 외교 다음으로 교육사업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낭독: 안창호] 독립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 아니 하는 이야말로 독립의 정신을 잃지 아니합니다. 국가를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시간 있는 대로 힘써 공부하시오. (출처- 청년에게 부치는 글 /도산기념사업회 편)

그는 또 조국의 미래가 청년들한테 있다면서 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했습니다.

[낭독: 안창호] 우리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본국에는 아직 우리의 힘으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지마는, 기회 있는 대로 공부해야 하고 시켜야 하오. (출처- 6대 사업(시국 강연) /도산기념사업회 편)

이렇게 교육에 남다른 뜻이 있었던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고향에 ‘점진학교’를 세웠습니다. 국민대학교 장석흥 명예교수는 점진학교 설립이 안창호의 초기 교육 사업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한국 국민대학교 장석흥 명예교수] “국내에서도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점진학교라고 한 발짝씩 점차로 나간다는 의미로 점진학교라는 걸 개설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 근처, 강서군에 있는 뱃고지라는 데다가 남녀공학 4년제 초등과정과 2년제 중학 과정을 두었던 건데, 이게 아마 1899년에 만들어졌으니까 도산 선생이 한 초기 교육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장석흥 교수는 점진학교가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안창호가 이 시기 탄포리교회를 세웠던 것으로 미루어, 기독교 계통 학교로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안창호는 학교 설립 후 곧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마련했는데요. 자신이 교장을 맡고 교사로는 최광옥과 이석원을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이 점진학교는 단순하게 공부만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요. 다시 장석흥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장석흥 명예교수] “그런데 이 점진학교라는 거는 공부만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인근에 하천에 제방을 쌓고 침수지를 메워 농토를 개간하는 그런 역할서부터 해가지고... 이것이 도산 선생의 무실역행... 힘써 일하자는 그런 뜻을 해가지고... 후일에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그리고 흥사단으로 발전해간 그런 초기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장석흥 교수에 따르면 점진학교는 교풍이 상당히 엄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잘못하면 안창호의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는 안창호가 성격이 온화했지만, 그가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는 또 시대를 앞서간 그의 남다른 교육관도 반영합니다. 국민대학교 장석흥 명예교수는 점진학교가 바로 평등한 인간관계에 대한 신념을 잘 보여준다고 강조합니다.

[녹취: 장석흥 명예교수]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점진학교에서 실행한 건 남녀공학이었어요. 그리고 도산 선생이 약혼녀와 여동생을 신교육을 시켰던 점. 이런 걸 보면 도산의 인간관과 사회 인식이 이미 남녀평등 사상을 실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안창호는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신념 아래 당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성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안병욱 한국 숭실대학교 교수는 오래전 그의 글 ‘도산 안창호’에서 점진학교가 초등교육 기관이었지만, 조선 사람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남녀공학 사립학교라는 점에서 안창호가 강조한 평등 교육의 실천장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안창호는 1902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2, 3년 남짓 점진학교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1895년 고향에 들렀다가 이석관이란 사람을 기독교로 전도했는데요. 그 인연으로 이석관의 딸인 이혜련과 약혼했습니다.

시골 처녀와 약혼한 안창호는 약혼녀가 신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약혼녀 이혜련과 자기 여동생 안신호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이후 안창호는 드디어 1902년 9월 3일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다음 날인 4일 머나먼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창호 첫 번째 시간으로 그가 대한제국에서 점진학교를 세우고 미국에 건너가기까지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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