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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미 위트컴 장군 상설전시관 개관… “전후 부산 복구, 유해 송환에 헌신”


민태정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왼쪽에서 네 번째 ) 등 참석자들이 12일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열린 ‘리처드 위트컴 장군 상설전시실' 개관식에 참석해 리본 커팅을 하고 있다.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군'으로 불린 리처드 위트컴 장군을 기리는 상설전시관이 부산에 문을 열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부산 재건에 헌신했던 위트컴 장군은 미군 유해 송환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연철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부산에 있는 유엔평화기념관.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엔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이 곳에 미군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상설전시관이 개관했습니다.

[녹취: 효과음]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커팅식이 있겠습니다. 하나 둘 셋 커팅”

위트컴 장군의 36주기 추모일인 12일 문을 연 전시관에는 장군의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당시 착용했던 군복과 모자, 권총집 등이 전시됐고, 장군을 기리는 특별다큐멘터리도 상영되고 있습니다.

유엔평화기념관의 박종왕 관장은 위트컴 장군이야말로 참군인의 표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종왕 관장] “위트컴 장군은 전쟁의 승리를 어떻게 이루어야 되는가, 진정한 승리의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었던 참군인이셨고, 세계평화를 어떻게 정착시켜야 되는가 하는 것을 몸소 실천한 세계시민의 참표상이셨습니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 제2군수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유엔군 군수지원과 한국군 전력 증강에 기여했습니다.

아울러,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의 재건에 헌신했습니다.

특히, 1953년 11월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자 지체없이 이재민 지원에 나섰습니다.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부산 중구의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14시간 동안 꺼지지 않았고, 부산역과 부산우체국은 물론 주변의 3천 채가 넘는 주택을 잿더미로 만들면서, 3만여 명의 이재민을 낳았습니다.

정권섭 전 부산 동서대 총장은 이 때 위트컴 장군이 미군 보급물자로 부산 시민들을 지켜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정권섭 전 총장] “특히 부산과 인연이 있는 것은 영주동 대화재 때 (미군 군수물자를) 난민들을 위해 보내서 써 주셨기 때문에….”

위트컴 장군은 군수물자를 동원해 이재민들을 위한 천막을 짓고 식량과 의복을 지원했습니다.

이 문제로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돼 추궁을 받은 위트컴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고 역설해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더 많은 구호물자를 싣고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위트컴 장군은 또, 열악한 부산의 의료 현실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피난민촌을 자주 방문하던 장군은 어느 날 보리밭에서 출산하는 산모를 목격하고는 병원 건립에 나섰습니다.

부대원들과 함께 월급의 1%를 기부하는 운동을 벌였고, 스스로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행진하며 기금을 모아 메리놀병원 등 여러 병원을 부산에 세웠습니다.

당시 메리놀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진 말로니 수녀, 한국명 문요한나 수녀의 말입니다.

[녹취: 문요한나 수녀] “사랑도 많고 아이들, 약한 사람들 편이라고, 높은 군인이라도 진짜 약한 자들을 위해서 많이 생각했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트컴 장군은 예하부대들에 부산 지역 복지기관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체계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던 장군은 부산대학교 부지 확보와 건물 신축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국 정부를 설득해 장전동 부지 50만평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도록 했고, 대학 건설비용 25만 달러를 제공받게 했으며, 예하의 공병부대를 통해 진입로 공사와 학교 부지 조성을 직접 지원했습니다.

김재호 부산대 교수는 당시 위트컴 장군이 부산대를 도와주는 입장이었지만 전혀 그런 표시를 하지 않았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녹취: 김재호 교수] “윤인구 (당시) 총장이 그린 캠퍼스 그림이 있어요. 장군 내 그림을 사시오. 그러자 장군이 내가 사겠소 하고 악수를 하는 장면이 나와요. 사실은 한 사람은 도움을 받고 한 사람은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 없이 격의없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고 야 이 분 너무 멋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위트컴 장군은 1954년 12월, 미 제2군수사령부 해체와 함께 전역했지만, 한국 사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위트컴 장군은 ‘한미재단’을 설립해 한국의 재건을 위한 다양한 지원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보육원과 고아원을 지원하면서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이후 1964년, 한국 최초의 아동보육시설을 설립했던 한묘숙 씨와 결혼했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 전쟁고아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위트컴 장군은 한국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숨진 미군의 유해를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마지막 임무로 여겼습니다.

김계현 위트컴희망재단 이사는 위트컴 장군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계현 이사] “유언이 장진호에 남아 있는 미군 유해 사업을 끝까지 해라, 그래서 한묘숙 여사가 끝까지 북한을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 하셨죠”

한 여사는 위트컴 장군 별세 이후 위트컴희망재단을 만들고 20여 차례 북한을 오가면서 미군 유해 송환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실을 거두지는 못한 채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산시 남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묘비.
부산시 남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의 묘비.

위트컴 장군은 1982년 서울 용산에서 별세했고,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묻어달라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 묻혔습니다. 유엔기념공원에 묻힌 미군 유해 32기 중 장성은 위트컴 장군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그 후 위트컴 장군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습니다. 부산대 김재호 교수의 말입니다.

[녹취: 김재호 교수] “장군님의 은덕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그런 분들이 기억을 안 했다는 것이 책임이 있습니다. 부산시와 부산시민들도 장군님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그것들도 책임이 있는 거죠.”

지난 2011년부터 위트컴 장군 추모식을 개최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등 장군의 재조명에 적극 나서고 있는 김 교수는 위트컴 장군의 삶을 연구하고 후대에 어떻게 물려주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군 제5군수지원사령부도 위트컴 장군을 정신적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부대 내에 위트컴 장군 기념시설을 마련한 박주홍 육군 제5군수지원사령관은 위트컴 장군이 자신들의 롤모델이라고 밝혔습니다.

[녹취: 박주홍 사령관] “타국의 재건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도적 삶을 발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정신을 계승해서 지난해에는 저희가 위트컴 장군실을 개관했습니다.”

부산주재 미국영사관의 댄 게닥트 영사는 위트컴 장군이 미-한 동맹의 상징이라며 앞으로 계속 장군의 유지를 받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게닥트 영사] “위트컴 장군을 보면 한-미 동맹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상징 중 하나입니다. 앞으로도 긴밀한 동맹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게닥트 영사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사람들이 위트컴 장군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위트컴 장군의 딸인 민태정 위트컴희망재단 이사장은 이번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상설전시관이 문을 연 것이 감격스럽다며, 아버지가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민태정 이사장] “본인이 하셨던 일을 계속 하겠다고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회를 위해서 많은 도움도 주고, 또 항상 약자를 위해 편들어 주시는 분이니까 약자를 위해서 또 많은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서 VOA뉴스 이연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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