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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에서 교육자로 - 리타 핀 아렌스 (4)


지난 1981년 리타 핀 아렌스(왼쪽)가 미국에 건너온 직후 부모(가운데), 오빠와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지난 1981년 리타 핀 아렌스(왼쪽)가 미국에 건너온 직후 부모(가운데), 오빠와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만나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시간입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탈출한 뒤 예일대를 졸업하고 교육자가 된 리타 핀 아렌스, 마지막 순서입니다.

리타 핀 아렌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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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미국 공교육 개혁과 이민 자녀 교육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는 교육자 리타 핀 아렌스 씨는 1981년 미국에 정착한 캄보디아 출신의 이민자입니다.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민간인 대학살, 킬링필드를 탈출해 부모님과 함께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왔는데요. 리타 씨는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 가운데 하나인 예일대학교를 졸업했고, 수학 교사를 거쳐, 지금은 워싱턴 DC에서 교육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저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정말 좋아요. 저는 의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정부가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 특히 가난한 계층 학생들과 소수계 학생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젠가 정책 전문가이자 연방 의원이 돼서 공교육 개혁을 주도하고, 또한 미국의 모든 학생이 자신의 배경에 상관없이 꿈을 이루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

연방 의원이 되어 미국의 공교육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리타 씨, 하지만 리타 씨는 어릴 때부터 교육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학 때 전공은 심리학이었는데요.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제가 14살 때였어요. 당시 아버진 식품회사에서 일하셨는데 그 날은 원래 아버지가 쉬는 날이었고, 다음날 우리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가기로 돼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 직원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원해서 출근했다가 그만 기계에 몸이 끼이는 사고를 당하신 거예요. 이후 평생 장애를 갖게 되셨는데요. 사고로 인한 신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 사고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갖게 되셨는데 과거 캄보디아에서의 괴로웠던 기억이 되살아나 큰 정신적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셨습니다.”

하지만 리타 씨와 온 가족은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고,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원래 캄보디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쉽게 털어놓지 않거든요.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그렇게 큰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셨어요. 사실 당시 많은 캄보디아 출신 난민들이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킬링필드가 남긴 상처와 아픔을 전혀 치료받지 못한 채 미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를 보면서 이건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고 또 치료할 수 있을지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리타 씨는 심리학 공부 이외에 여러 대학 활동을 통해 또한,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런 고통을 끝낼 수 있는 해법을 바로 교육에서 찾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육은 어릴 때부터 리타 씨의 부모님이 강조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저희 부모님은 다른 아시아인 부모들처럼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사실 돈 버느라 정신이 없으셨기 때문에 앉아서 공부를 봐주실 여력도 없으셨고요. 하지만 공부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다 보니 우리가 알아서 공부했던 것 같아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저 역시 자녀들에게 억지로 공부를 시키기보다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강조합니다. 아이들에게 난민의 딸이자 아들이라는 점을 늘 상기시키고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건지 늘 말해주죠.”

11살인 딸과 이제 곧 4살이 되는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4살 때 난민 소녀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던 리타 씨의 과거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갖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교육자로 키워준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요. 오리건 주에서 리타 씨 오빠 가족과 함께 사는 리타 씨의 아버지 포움 핀 씨는 착하고 똑똑하게 자라준 딸이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녹취: 포움 핀] “리타는 정말 착한 딸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착할 수가 없었어요. 부모의 말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지요. 거기다 얼마나 공부를 또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걱정을 할 정도였죠. 제가 캄보디아에서 미국으로 오기로 결심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바로 아이들의 교육 때문입니다. 저는 크메르루주 정권에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우리 아이들만큼은 미국에서, 최고의 교육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딸이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최고 명문인 예일대학교까지 가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포움 핀 씨는 다른 주에 살기 때문에 딸과 사위, 손자들을 자주 보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인정받고 있는 딸은 최고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녹취: 포움 핀] “저는 리타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사실 우리 딸이 워싱턴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무척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저는 캄보디아 여성, 그러니까 아시아 여성이 이렇게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아시아계 여성 이민자들에게 본이 되니까요. 킬링필드에서 태어났지만, 이렇게 미국에서 성공한 딸을 볼 때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현장음: 메릴랜드 캄보디아 새해맞이 행사]

지난해 4월 16일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진행된 캄보디아 전통 새해맞이 행사에 가족과 함께 참석한 리타 핀 아렌스(왼쪽). 가운데가 딸이고, 남편(오른쪽)이 아들을 안고있다.
지난해 4월 16일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진행된 캄보디아 전통 새해맞이 행사에 가족과 함께 참석한 리타 핀 아렌스(왼쪽). 가운데가 딸이고, 남편(오른쪽)이 아들을 안고있다.

지난 4월, 워싱턴 인근에서 열린 캄보디아 새해맞이 행사에서 리타 씨는 캄보디아 전통 의상을 입고 캄보디아의 전통춤을 선보였습니다. 그것도 딸과 함께 말이죠. 죽음을 피해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고향 캄보디아는 이제 리타 씨가 자랑스러워 하는 뿌리이자,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이 됐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저는 캄보디아 미국인 공동체에 깊이 관여해서 활동하고 있어요. 메릴랜드 주에 있는 캄보디아 절에도 늘 가고 캄보디아인 행사에도 참여하죠. 물론 저희 자녀들도 꼭 데리고 가요. 요즘은 딸과 함께 캄보디아 전통 춤을 배우고 있는데 자녀와 함께 모국의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라요. 더군다나 제 남편은 뉴욕 출신의 유대인인데요. 캄보디아 음식과 문화를 아주 좋아해서 모든 캄보디아 행사에 동참합니다.”

기업 자문회사를 운영하는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리타 씨. 캄보디아 난민 출신 연방 하원의원을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달려갑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미국은 누구나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놀라운 나라예요. 누구나 성공 신화를 쓸 수 있죠. 물론 성공을 이루기까지 어려울 수 있어요. 우리 가족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잖아요? 그 누구라도 그 어떤 꿈이라도 이룰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캄보디아 출신의 교육자 리타 핀 아렌스 씨의 마지막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난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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