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만나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시간입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탈출한 뒤 예일대를 졸업하고 교육자가 된 리타 핀 아렌스, 두번째 순서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1970년대, 캄보디아 인구의 약 1/4이 희생된 크메르루주의 양민 대학살. 킬링필드라고 불렸던 죽음의 현장을 탈출한 난민 가운데는 미국에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워싱턴 DC에서 활동 중인 교육자 리타 핀 아렌스 씨 역시 그중 한 명입니다. 리타 씨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폭정을 펼치던 1977년에 태어났는데요. 리타 씨 덕분에 어머니는 죽음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제가 태어난 지 사흘이 지나고 캄퐁참 마을에 큰 트럭이 한 대 들어왔대요. 트럭운전사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을 가져와서는 이 사람들을 트럭에 태워 수도 프놈펜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죠. 지금 새 정부가 세워지고 있는데, 목록에 있는 이 지식인들이 새 정부 건립을 도울 거라고 하면서요. 저희 어머니 이름도 거기 있었죠. 하지만 사흘 전에 출산을 한 저희 어머니는 마을 외곽에 있는 트럭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트럭을 타고 가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이후 돌아온 것은 트럭을 타고 갔던 사람들의 옷가지뿐으로, 트럭을 타고 간 사람들 모두 처형됐다고 합니다. 매우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캄보디아 정부에서 수출입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캄보디아를 탈출하게 됐고, 2년간의 난민촌 생활을 거쳐 1981년,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미국 서북부의 아이다호에 정착했어요. 1981년 9월 말에 도착했는데 환경이 너무 달라서 힘들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열대성 기후인데 아이다호는 너무 추운 거예요.”
리타 씨와 가족들에겐 추운 날씨만큼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낯선 문화와 언어였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저희 아버지는 정부에서 일하셔서 영어를 좀 하긴 하셨지만,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는 아니셨어요. 대신 프랑스어는 완벽하게 하셨죠. 살길이 막막했던 부모님은 결국 대학의 프랑스어과를 무작정 찾아가서 프랑스어 교수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대요. 아주 현명하셨던 거죠. 하지만 원하는 직업을 찾진 못하셨어요. 캄보디아에 계실 때 받은 대학 졸업장과 국가에서 일했던 모든 서류를 크메르루주 당국자들이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부모님의 학력이나 경력을 증명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대학에 다시 진학해서 영어 수업을 듣기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허드렛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식당에서 채소를 써는 일이었습니다. 영어도 잘 못 하고, 생계를 위해 바쁘게 일하셨던 부모님은 자녀들의 공부를 전혀 봐줄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리타 씨와 오빠 챈티 씨에게 늘 배움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아버지는 늘 저와 오빠에게 당신이 어떻게 공부하셨는지를 말씀해주셨어요. 과거에 캄보디아에선 아무나 학교에 갈 수 없었대요. 하지만 공부가 너무 하고 싶으셨던 아버지는 홀로 시골 집을 떠나 8살 때 절로 들어가셨죠. 스님들로부터 글을 배운 아버지는 대학 입학시험에서 전국 3위를 하실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결국 정부에서 일할 기회도 얻으셨다고 해요. 아버지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한 가지 빼앗기지 않은 것이 바로 아버지가 받았던 교육이라고 하셨어요. 아버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내 머릿속에 있는, 내가 배운 지식은 빼앗을 수 없다는 걸 강조하셨어요.”
당시 아시아계 학생이 거의 없었던 아이다호에서 다른 생김새와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갖고 생활했던 리타 씨는 학교에서 인종차별도 경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강조하셨던 교육의 중요성은 리타씨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이유가 됐고, 리타 씨가 흔들릴 때마다 부모님은 대학살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뭐든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느냐며 용기를 주셨다는데요. 리타 씨는 결국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제가 살던 트윈폴스엔 당시에 고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었어요. 전체 인구가 3만 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죠. 저는 어릴 때 다른 주로 여행을 가본 적은 있지만,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어릴 때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모의대학입학시험(PSAT)’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죠. ‘내셔널 메릿 장학금’이라는 권위 있는 장학금 수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여러 대학으로부터 전체 장학금 제안도 받았고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이 생긴 거예요. 고민하다가 결국 예일대학교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다호의 시골집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부 코네티컷 주에서, 그것도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있는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리타 씨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예일대에서의 생활은 정말 멋졌어요. 똑똑하고 영감을 주는 친구들과 졸업생들 그리고 교수님들 사이에 둘러싸여 생활했으니까요. 한번은 친구들과 회의를 준비하는데 한 명이 “지미를 연사로 초청하는 게 어때”라고 하는 거예요. 전 속으로 ‘지미가 누구야?’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말한 거더라고요. 그 친구가 카터 전 대통령의 개인 연락처를 알고 있었던 거죠. 이렇게 유명인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 또 실제로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리타 씨는 그리고 대학 생활을 통해 의미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친구들은 다들 늘 새로운 아이디어로 넘쳤어요. 여러 가지 활동과 운동을 벌였죠. 저는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지뢰금지운동에 동참했어요. 저의 고향 캄보디아에 아직도 지뢰가 많고, 또 지뢰로 인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우리 학생들의 운동이 기초가 된 '국제지뢰금지운동 (ICBL)’이 199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겁니다. ”
리타 씨는 지뢰금지운동을 통해 학생으로서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것도 좋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모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고 하는데요. 이런 경험들을 통해 리타 씨의 교육자로서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캄보디아 출신의 교육자 리타 핀 아렌스 씨의 두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교육자가 된 리타 씨의 이야기와 동료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