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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위스 사업가 '나의 평양 체류기' 책 펴내


북한 정부 대표와 함께 국제리더 양성 프로그램 계약서에 사인하는 펠릭스 압트 씨(왼쪽).
북한 정부 대표와 함께 국제리더 양성 프로그램 계약서에 사인하는 펠릭스 압트 씨(왼쪽).
스위스 사업가가 평양에서의 경험담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펠릭스 압트 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책 제목이 '북한의 자본주의자: 은둔의 왕국에서 보낸 나의 7년 A Capitalist in North Korea: My Seven Years in the Hermit Kingdom)'입니다. 사업 뿐만 아니라 북한 간부들을 대상으로 경영학교까지 운영했기 때문에 북한의 사정을 잘 아는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연호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문) 외국인이 평양에서 사업을 한다, 쉬운 일은 아닐 거 같은데요, 맨처음에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셨습니까?

답) 2002년초였는데요, 스위스의 정밀기계회사인 ABB로부터 북한 지사장을 맡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북한이 곧 시장개혁을 단행할 거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모험가나 개척자의 삶을 살고 싶었던 터라 북한에 가서 사업한다는 생각에 흥분됐었습니다. 그전에 베트남에서 일하면서 베트남이 어떻게 개혁을 이뤄나가고 발전했는지 직접 봤습니다. 북한이란 나라가 변화와 개혁을 해 나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현장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문) 북한 지사장으로 있으면서 어떤 일을 하신 거죠?

답) 북한 기간산업 분야에서 어떤 사업기회가 있는지 알아보고, ABB 상품도 판매했습니다. 북한에 협동농장들이 있는데 전기시설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전기공급에 필요한 제품들을 팔았죠. 그 뒤에는 다국적 기업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광산 설비와 국영 섬유기업에서 쓰는 염료도 팔았습니다.

문) 그런 경험 덕분에 평양에서 유럽 기업들의 모임도 만드신 거군요.

답) 평양에서 유럽기업들을 대표하는 서양 사람들이 ‘유럽기업협회’(European Business Association)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외국기업들이 어떤 식으로 영업을 하는지, 북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북한 당국에 설명해줬습니다. 말하자면 외국인 상공회의소였는데요, 북한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문) 북한 당국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협조적이었습니까?

답) 시간이 지나면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북한 당국자들과 만나 설명을 많이 했습니다. 북한에 진출했다가 실패하는 외국기업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기업들을 맥빠지게 하고 있다고 했죠. 이건 북한에도 이로울 게 없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 당국도 우리의 얘기를 이해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을 위해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세금을 내리고, 현지인 채용도 더 쉽게 해줬습니다. 북한 당국과 계속 대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문) 외국 기업인들은 평양에서 어떻게 지냅니까? 자기 나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까?

답) 중국 사업가들이 평양에 많이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조금 있고, 러시아에서 온 사업가들도 몇 명 됩니다. 평양에 여러 종류의 식당이 있어서 중국, 일본, 이탈리아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햄버거를 먹고 싶은 사람은 패스트 푸드점, 속성 음식점에 가면 됩니다. 가라오케, 노래방도 있고 연회도 자주 열려서 서로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골프와 테니스같은 운동을 할 수도 있고, 북한 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우는 외국인도 있었습니다. 여행도 다녔는데요, 여름에는 남포 해변에 가서 수영을 했습니다.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을 필요없이 차를 타고 해변에 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북한 사람들하고 음식과 음료수를 나눠 먹기도 했죠. 원산 해변도 갔는데, 그 때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허가를 받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문) 평양에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답) 제 차가 있어서 혼자 운전하고 다녔습니다. 외국인이 평양을 방문하면 안내원들하고 항상 같이 다녀야 하지만, 저는 혼자서 운전하고 걸어다녔습니다. 평양 바깥으로 나갈 때도 당국의 허가를 쉽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름에는 전기가 끊겨서 냉장고가 쓸모없게 되는 바람에 불편했습니다.

문) 북한의 기업 간부들을 대상으로 평양경영학교도 운영하셨죠. 어떤 계기로 학교를 세우신 겁니까?

답) 90년대부터 북한이 인도적 지원에 크게 의존해 왔고, 제 개인적으로도 북한 시골의 가난과 식량난을 직접 봤습니다. 그래서 비용을 덜 들이면서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했죠. 그러다 식량공급에 관련된 북한 기업들을 다시 소생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북한 당국이 학교 설립목적을 이해하고 협조해줬습니까?

답) 당국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얘기했는데, 경제가 좋아야 만성적인 식량난을 덜 수 있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외부지원에 의존하는 문화를 계속 끌고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 경영학교가 북한의 정치체제를 흔들지 모른다는 의심부터 먼저 잠재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범 강의를 하고 시범 토론회도 열어서 북한 당국을 설득했습니다. 자본주의 기업이든 사회주의 국영기업이든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할 순수한 경영기법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문)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학교가 문을 연 거군요. 수강생들에게는 생소한 과목들이 많았을 거 같은데 어떤 과목들을 가르치셨습니까?

답) 처음부터 일반 학생이 아니라 국영기업 간부들을 대상으로 만든 학교였기 때문에 기업 회계와 경영 전략, 시장개척과 유통 관리를 가르쳤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간부들한테는 생소한 과목들이었죠. 스스로 판단하고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아보는 걸 배운 겁니다. 1년 과정 강의에 30명의 간부들이 참여했는데, 3분의 1은 여성이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북한 대학에 소속되지 않고 별도로 운영됐고 졸업생에게는 수료증을 줬습니다.

문) 가르치는 선생님이 누구냐도 중요할텐데, 강사들은 어디서 데려왔습니까?

답) 세계 여기저기서 강사가 왔는데, 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국적 기업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저희 학교를 후원하는 기업들이 강사 비용을 댔습니다. 그러다 2006년에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한 뒤에는 기업들이 후원을 중단했습니다. 스위스 개발협력청의 지원만으로 학교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강사들은 주로 중국에서 기업을 설립해 본 경험이 많은 홍콩 전문가들이나 싱가포르와 홍콩, 캐나다의 대학 교수들이었습니다.

문) 그러다 2010년이었죠. 스위스 개발협력청마저 지원을 중단해서 학교가 문을 닫았는데, 학생들, 그러니까 북한 기업간부들은 어떤 얘기를 하던가요? 도움이 됐다고 합니까?

답) 아주 활발한 토론을 자주 가졌는데,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 평가를 해달라고 하면 아주 높은 점수를 줬습니다. 나중에 저와 만나서는 학교에서 배운 경영기법을 실제로 어떻게 적용했는지 얘기했는데, 생산성을 높였고 고객들의 불만도 줄여서 적자에서 흑자 경영으로 돌아섰다고 했습니다.

문) 스위스 기업의 북한 지사장으로 처음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셨는데, 그 뒤에 합작사업도 많이 하셨죠.

답) 네, 여러가지 사업을 북한에서 했습니다. 평스제약 합영회사의 관리이사를 맡았고, 소프트웨어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합작회사도 공동 설립했습니다. 유럽 기업들의 대리인으로 광산 설비를 북한에 팔기도 했습니다. 평양에서 굉장히 많은 활동을 했는데요, 북한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북한을 이해하고 북한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북한측 합작상대나 현지 직원들, 당국자들과 협조가 잘 됐죠. 20년 전 중국과 베트남에 외국인 사업가들이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훨씬 더 고생했습니다.

문) 평스제약회사 얘기를 더 해 보죠. 이 회사하고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신 겁니까?

답) 관리이사로 채용된 건데요, 저보다 앞서 두 사람이 관리이사로 일하다 나갔습니다. 당시 회사 사정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생산제품은 두 종류밖에 없었는데 구매자가 없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인정하는 식품제조기준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제기구들에도 제품을 팔 수 없었습니다. 비용은 계속 들어가는데 매출은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회사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이나 북한 측 모두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제게 경영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저마저 성공하지 못하면 회사 문을 닫겠다면서요. 그래서 2006년에 관리이사 자리를 맡아서 3년 정도 일했습니다.

문) 주로 어떤 약을 만드셨습니까?

답) 아스피린과 파라세타몰같은 진통제를 만들다 나중에는 다양한 의약품들로 생산영역을 늘려 나갔습니다. 감염 질환 치료에 필요한 항생제들과 심장질환 환자들을 위한 약도 만들었습니다. 주로 북한에 많이 팔았는데요, 도매상이나 유통업자, 약국에서 저희 제품을 사갔고, 저희 회사가 자체적으로 약국을 열기도 했습니다. 인도적 지원을 하는 국제기구들에도 납품을 했습니다. 우리 제품을 사서 북한에 지원한 국제기구들도 있습니다. 또 아프리카 수단에도 판매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국제적인 품질기준을 충족한다는 걸 증명해야 했습니다. 특히 국제기구에 납품하기 위해서는 품질 뿐만 아니라 가격 경쟁력도 있어야 합니다.

문) 경영을 잘 하셔서 회사를 다시 일으키셨군요. 그런데 북한에서 합작사업을 하려면 어려운 일도 많았을 거 같은데, 자본주의식 회사 경영에 낯설어 하지 않던가요?

답)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회사 경영방식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얘기를 많이 해야 했고, 가끔씩 열띤 토론도 있었습니다. 판매촉진을 담당하는 부서를 새로 만들 때도 그랬습니다. 생산전문 회사가 아니라 판매도 직접 해야한다는 걸 북한 측에 이해시키고 동의를 얻어내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판매촉진 담당 부서가 생기고 직원도 뽑고, 광고도 했습니다. 그 뒤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이상 토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문) 북한에서 기업을 운영하려면 교통 통신이나 전기 문제도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그런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었고, 하나씩 풀어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 측과 다투는 일은 없었고 다만 오랜 협상과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안정적인 전기공급과 국제 통신수단이 필요하고 매일 전자우편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죠. 몇 번 요청을 하고 나면 북한 측에서 받아줬고 그 결과에 대해서 모두가 만족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는데 의약품이 매우 중요한 만큼 특별히 전기공급도 안정적으로 받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문) 현지인력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의약품을 만드는 회사라 아무나 와서 일할 수는 없었을텐데요.

답) 대학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면접시험을 하고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이 풀렸습니다. 북한 측에 어떤 능력을 갖춘 인력이 필요한지 설명했죠. 무엇보다 약학 전공자와 실험실에서 일할 생화학 전공자가 필요했는데, 김일성 대학과 김책공대에 가서 설명을 했습니다.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저희 회사에 찾아와서 면접시험을 봤고 그 중에 몇 사람을 채용했죠. 모두들 열심히 일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라 일도 금방 배웠습니다. 회사가 아주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문) 이번에 쓰신 책 얘기를 해보죠. 제목이 “북한의 자본주의자” 압트 씨 본인을 두고 한 말인 거 같고, 부제목이 ‘은둔의 왕국에서 보낸 나의 7년”이네요. 어떤 계기로 책을 쓰신 겁니까?

답) 북한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봤는데, 좁은 시각으로 북한의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경험담을 독자들에게 직접 전해주기로 한 거죠. 저는 지금도 북한과 정기적으로 연락하면서 그쪽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평스제약회사를 더이상 직접 경영하지는 않지만 지분도 일부 갖고 있고, 가끔씩 북한을 다녀오는데 지난 해 4월에도 갔었습니다.

문) 북한에 가 보시니까 개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보이던가요?

답) 북한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양에 있습니다. 뭔가 바꿔야 한다는 걸 알고 있죠. 흔히들 북한이 아직도50년대 스탈린주의 국가에 머물고 있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10년동안 북한 사회와 경제, 문화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주요 도시에서 중산층이 생겨나고 있고 일부는 장사로 큰 돈을 벌고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산을 개간해서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전보다 더 색깔이 화려해졌습니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죠. 그리고 북한 당국도 이런 변화의 일부는 그냥 눈감아 주고 있습니다.

문)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 얘기하셨는데, 지난 10년을 돌아봤을 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뭔가요?

답) 북한 사람들이 장사에 눈을 뜨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 장사꾼들한테서 물건을 사는 국영기업들이 있는가 하면, 국영기업의 그늘 아래서 장사를 하는 관리들도 습니다. 바깥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장활동이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결국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힘이 세질수록 더 강하게 주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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