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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풍경] 중국으로 팔려간 여동생과 16년 만에 재회한 미국 거주 탈북민 


태국 치앙라이주 치앙셴 마을 강둑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탈북 여성. (자료사진)

매주 금요일 북한 관련 화제성 뉴스를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입니다. 미국에 난민 자격으로 정착한 40대 탈북 남성이 16년 전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한 여동생을 찾았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막내 동생을 찾은 탈북 남성의 이야기를 장양희 기자가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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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미 서부 유타주에 정착한 40대 탈북 남성 크리스 최 씨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요리 경력을 쌓았습니다.

최 씨는 솔트레이스시티 중급 호텔의 요리사로 일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슴을 누르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2년 전, 미국에 정착한 이후 계속 찾았던 여동생의 사망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 최 씨가 막내 여동생의 인신매매 소식을 처음 들은 건 탈북하기 전이었습니다.

[녹취: 크리스 최] “2003년인지 2004년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중국에 들어간 게 2002년에 들어갔다가 2004년에 나왔으니까. 중국에서 들었는데 장춘 감옥에 간 애들이 그러는데, 동생이 중국에 들어온 거 같다고. 중국에 있을 때 알려주더라고요. 농담하는가 했죠. 그랬는데. 집에 가니까, 돈 벌어가지고, 금방 나오겠으니까.. 기다리라고 그렇게 편지에 짤막하게 써놓고 갔더라고요.”

충격에 빠진 최 씨는 여동생을 찾으려고 수소문 했고, 동생을 팔아넘긴 인신매매꾼들의 수감 소식을 접했습니다.

동생의 행방을 물을 길이 없게 된 최 씨는 당시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탈북이라는 고통스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쩔 수 없는 탈북여정을 시작한 최 씨는 태국의 난민수용소에 도착했고, 이후 아버지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최 씨는 맏이로서 큰 죄책감이 들었고, 미국에 가서 자유로운 신분으로 여동생을 꼭 찾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년 3개월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입국한 뒤 한국 내 브로커들을 상대로 동생의 행방을 찾았던 중, 2018년 정거리 교화소에서 나온 북한 여성으로부터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녹취: 크리스 최] “(동생이)집에 있을 때 엄청 고생했거든요. 어리니까. 나는 왔다갔다 하지만 집도 먹을 게 없어서 엄청 고생했거든요. 맨날 풀만 먹고.. 제가 큰 놈이니까. 내가 부모 대신해서 잘 입히고, 시집 보낸다 생각했는데, 그 애를 엄청 많이 해주자 했죠. 13-14살까지 업고. 큰 오빠라고 나이 차이가 많으니까, 잘했든 잘못했든 걔를 두둔하고 그랬죠.”

자식이 많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 해 늘 안쓰러워 했던 동생의 허망한 죽음에 가슴을 쳤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북한에 있는 동생들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녹취: 크리스 최] “밤에 11시인가. 그 때 오면 짐작하거든요. 북한에서 온다는 거. 사람이 없는 산에서 파장이 잡히는 민가 떨어진 곳에서 하는데, 동생들이 막내를 찾았다고 전화를 했더라고요. ‘죽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소리냐?’. 하니까, ‘동생하고 연락되어 돈까지 보내줘서 돈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어딨냐고 하니까..”

북한에 남겨진 가족, 그리고 이역만리 떨어진 큰 오빠만 여동생을 찾았던게 아니었습니다.

여동생도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믿고 집을 떠난 후 지금까지 애타게 가족을 찾고 있었던 겁니다.

[녹취: 크리스 최] “제가 여기서 10년 동안 찾았는데, 동생도 노력했죠. 엄청나게, 그 여자동생이 우리 집에 소식 내보내 달라고. 전화번호도 주고, 몇 번 하던 중에 마지막 하던 여자가 심부름을 제대로 해서 북한에 연락이 닿은거죠. 브로커가 결국 우리 남자동생 아들하고 전화로 연결시켜 준 거죠. 심부름 한 애가 연결이 닿으니까 …”

지난해 12월, 15년 만에 가족과 연락이 닿은 여동생이 처음 한 것은 가족의 설 명절 선물로 돈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신분 없이 숨어사느라 마음 고생이 심했을텐데 오히려 가족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으로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 가슴이 아팠다고 최 씨는 말합니다.

여동생과 16년 만의 재회가 이뤄진 날, 최 씨도 울고 여동생도 울었습니다.

[녹취: 크리스 최] “처음엔 믿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목소리 다 알고 있으니까. 가는 하도 시간이 지났지 하니까, 큰 오빠 목소리가 어떤지 그런데 동생이 ‘ 오빠, 나를 왜 이렇게 늦게 찾았어, 자기를 왜 이렇게 늦게 찾았냐고 그러면서 막 울더라고요…”

‘왜 이렇게 늦게 찾았냐’며 우는 동생과 함께 울었다는 크리스 최 씨.

오빠와 미국에서 같이 살 거라며 당장 미국에 오고 싶다는 여동생과 최 씨는 ‘위챗’으로 매일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데요,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여동생의 얼굴은 그대로입니다.

[녹취: 크리스 최] “4일 만에 영상통화 됐거든요. 그래 보니까, 애가 일없다 해도, 고생 많고 하니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얼굴은 모습은 조금 변해도 동생 모습 그대로, 우리 막내는 오빠 얼굴이 하나도 생각이 안난대요. 하나도 모르겠던 게. 아무리 얼굴을 생각하고 싶어도 모르겠더래요.”

최 씨는 오후 4시 반이면 여동생에게 전화를 겁니다.

집에서 40분 쯤 떨어진 의복공장에서 재봉사로 취직이 된 지도 오래된 일은 아닌데요, 그동안 손전화도 없이 살다가 이곳에서 일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매일 출퇴근 시간에 동생의 연락을 받으며 여동생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사는지까지 하나 씩 알아가고 있는데요, 그동안 염려하고 궁금했던 것들입니다.

[녹취: 크리스 최] “세탁기도 용량이 작으니까, 손 빨래 하더라고요, 목욕도 집에서 못하는 거고, 집은 보니까, 한심하죠. 차에 치는 방수 그런 걸로 위에 비 안 새게 하고, 집 안에는 비닐벽지 바르고, 위에는 비닐하고 나무방망이를 대서… 북한의 집보다도 못하더라고요.”

최 씨는 여동생이 중국에서 처음 팔린 곳에서 도망 나와 지금 사는 곳으로 오게 됐고, 장애인 시어머니를 둔 광부 남편과 살게된 이야기 등을 듣게 됐습니다.

호적이 없이 살아도 한 동네 사람들이 자신이 탈북민이라는 것을 알면서 신고하지 않는다면서 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오누이의 정은 더 쌓여갑니다.

최 씨의 여동생이 오빠에게 보낸 동영상에는 마스크와 헬멧을 쓰고 출근하며 “옛 써” 라고 씩씩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녹취: 크리스 최] “뭐랄까.. 막내 한테 말한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큰 오빠 내가 40다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쪼끄만 애기처럼 말하지마‘. 그러더라고요,(웃음) 그냥 어릴 때 소감이니까, 그렇게 말이 나가는 거죠. 애기처럼 대해주고, 조그만 애들한테 하듯이 ‘00야~ 밥 먹었니?”하니까.”

그러나 두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현실의 벽을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최 씨는 여동생이 마음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녹취: 크리스 최] “처음에는 막 오빠한테 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여기로 오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오빠한테 가서 살겠다고. 그러다가 한 번 두 번 세 번 쯤 되니까. 그 다음 부터 ‘마흔 살이 다 돼 가는데, 거기 가서 또 고생할 생각하니까.. 아들 놈들을 가자고 그렇게 설득했는데, 기여코 안오겠다고 그래서 망설인다’고, 하루는 ‘응’했다가 하루는 아무대도 안 갈거야 그러고..”

중국인 남편도 불법체류자인 아내를 혼자 내보낼 수 없다며 오빠가 직접 오라는 입장이고,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미국에 갈 마음이 없으니 엄마가 자식을 놓고 혼자 갈 수 없어 고민이 많다는 겁니다.

최 씨는 여동생의 안전을 위해 이름과 나이, 거주 지역과 현지 가족의 정보 등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여동생이 중국을 떠나는 일이 10년 전 자신이 겪은 탈북 여정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현재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이동제한이 심한 상황에서 최 씨의 중국 방문도 기약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최 씨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녹취: 크리스 최] “이제 코로나 빨리 끝나야 하는데 시간이 가면, 주저앉겠다고 하면.. 난리죠. 아무리 오고 싶어도. 안 오겠다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데려오고 싶어도. 오라오라 하는데, 그렇게 오라고 하는데, 안오겠다고. 왜 가냐고. 눕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최 씨는 동생을 만나게 된 기쁨이 큰 만큼, 탈북과 인신매매, 중국 내 상황 등, 이런 현실을 만든 북한 정권에 화가 난다고 말합니다.

김 씨 집안 배를 채우느라 수 천만 북한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고, 가족끼리 왕래도 못하는 나라가 북한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최 씨는 여동생을 다시 만나기 위해 민간단체와 접촉하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는대로 영주권자인 자신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계획입니다.

여동생에게 더 좋은 세상에서 제대로 된 신분을 갖고 살도록 천천히 바깥세상 이야기도 들려주고, 같은 처지의 탈북 여성들이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시간을 두고 천천히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고 최 씨는 말했습니다.

최 씨는 요리사가 된 오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동생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서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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