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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주요전투 참전 이종연 변호사 "장진호 피난민들 잊을 수 없어"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미국 상륙함에 오르려는 군인과 피난민들.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미국 상륙함에 오르려는 군인과 피난민들.

한국전쟁의 주요 전투였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장진호 전투에 모두 참전해 현장의 참상을 생생하게 겪은 참전용사가 있습니다. 전쟁 당시 한국인 통역장교로 미 해병대 1사단과 함께 전장을 누빈 이종연 씨인데요. 이 씨는 VOA에, 장진호 전투 당시 군인들뿐 아니라 수많은 피난민이 희생됐다며, 이런 비극이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6·25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싸우며 전장의 참상을 생생하게 겪은 노령의 신사가 있습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한국전쟁은 상당히 비극이죠. 왜냐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특히 군인들뿐 아니라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이남에서도 이북에서도 그렇고. 그것이 아주 비극적이죠.”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통역장교로 복무한 이종연 변호사. 사진 제공 = 이종연.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통역장교로 복무한 이종연 변호사. 사진 제공 = 이종연.

그의 이름은 올해 91살의 이종연 변호사. 한국 국군의 통역장교로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돼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장진호 전투 등 한국전쟁의 기념비적 전투에 참전했던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공산국가란 것은 노예제도이니까 결국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했죠. 포기하고 항복할 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참 고생이 많았고 너무 희생이 많았죠. 한국인들에게는.”

황해도 연백 출신인 이 변호사는 1950년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북한의 침공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급히 전라남도 광주의 친구 집으로 피란을 떠난 그는 미국 워싱턴에서 방송하는 VOA 뉴스를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VOA는 절대적이었죠. 매일 들은 게 Voice of America죠. 그거 들어서 전세가 어떻게 되고 이북 군대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다른 것은 신용할 수 없었고 Voice of America는 상당히 신용도가 높았습니다. 그걸 듣고서 결국 인민군이 전라도 쪽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대구로 가서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북한군의 갑작스런 침공으로 방송국 등 사회기반시설이 파괴되자 당시 많은 한국인은 VOA 방송에 의지해 정확한 전황과 유엔군의 참전 소식 등을 접할 수 있었다고, 이 변호사는 말했습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미국의 소리’ 없이는 정말 블라인드였죠. 그거 없이는 어떻게 전쟁이 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다른 것은 잘 안 들리니까. 정말 중요한 저희의 정보였죠. 특히 인텔리-지적인 사람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총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청년 이종연은 영어 특기자로 갑자기 육군 통역장교에 발탁됐고, 한국에 도착한 미 해병 1사단에 배속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됩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미 해병대가 상당히 훈련된 군대였습니다. 도착한 대원들이 2차 대전 때 일본과 소위 태평양전쟁에서 4년 간 싸운 분들이라 상당히 잘 싸웠고 군기가 심했고, 전쟁에 참 공헌이 많았습니다. 거기서 제가 같이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미 해병대의 공헌으로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뒀고,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당시의 환희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상당히 기뻤죠. 야 서울에 다시 돌아간다! 싸움을 미 해병대가 정말 잘했어요. 솔직히 인천은 piece of cake(식은 죽 먹기)이었죠. 간단히 상륙할 수 있었고, 하나의 즐거움이었죠. 서울 수복도 상당히 감개무량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영하 30~40도의 혹한 속에서 아군보다 8배나 많은 중공군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장진호 전투입니다.

1952년 'Legion of Merit' 훈장을 받는 이종연 변호사. 사진 제공 = 이종연.
1952년 'Legion of Merit' 훈장을 받는 이종연 변호사. 사진 제공 = 이종연.

미군은 1950년 11월 26일부터 17일 동안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너무 고생을 많이 했죠. 저 개인뿐 아니라 미 해병대도 마찬가지고. 또 거기 있는 민간인들이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장진, 삼수, 갑산의 피난민들 몇 천 명이 우리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 추운데 잘 곳도 없고요.”

게다가 중공군이 피난민들 속으로 들어가 미군을 공격했기 때문에 총을 상대에게 겨눌 수밖에 없었고,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수문교를 폭파하면서 흥남으로 향하던 많은 피난민의 길이 끊겨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겁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흥남과 함흥 쪽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생을 크게 안 했습니다. 그러나 저 내륙의 삼수, 갑산, 장진의 사람들은 거진 한 달이 걸려 흥남까지 걸어오는 거죠. 진짜로 비참한 행군이었습니다. 흥남까지 얼마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피난민들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아울러 부대원 300명이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됐을 때, 홀로 포탄이 난무하는 탄약수송 트럭에 올라 부상병과 대원들을 살리고 산화한 윌리엄 맥클렁 상사, 시골 오두막집 소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올리버 스미스 해병대 제1사단장의 속기사 이야기 등 장진호 전투에는 수많은 애환과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고 그는 회고했습니다.

이종연 씨는 이후 함께했던 미 예일대 출신 병사들의 추천을 받아 1954년, 미 예일대 유학길에 올라 같은 학교에서 법대를 졸업한 뒤 미 변호사가 됐습니다.

이종연 변호사가 지난 2018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기념 행사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참전용사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 = Ned Forney.
이종연 변호사가 지난 2018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기념 행사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참전용사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 = Ned Forney.

특히 1967년부터 20년 간 미 8군 고문 변호사로 한국에서 활동하며 미-한 동맹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다음 세대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너무 희생이 많아요. 특히 민간인들. 그렇다고 공산국가에 항복할 수 없지요. 우리가 전쟁에서 얻은 교훈은 완전히 준비하라는 겁니다. 준비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할 일이 아직 많아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변호사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인 황해도 연백 땅을 다시 밟는 것입니다. 하지만 70여 년째 꾸는 이 꿈을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며, 긴 분단의 비극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종연 변호사] “솔직히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친구들, 친척들, 제가 살던 시골 동네, 학교 다니던 산골짝의 길들, 가고 싶은 희망은 말할 수 없죠. 가고 싶은 마음은 정말 한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걸 어떡하나요? 이 감정을 죽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 한이라는 것은 죽을 때에도 풀지 못하고 죽을 것 같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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