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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김정은 7·27 정전협정일 연설, 역사 왜곡 심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평양 4.25 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회 전국 노병대회에서 연설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평양 4.25 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회 전국 노병대회에서 연설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기념일인 지난 27일 전국노병대회에서 한 연설은 역사적 사실을 상당히 왜곡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침략의 주체뿐 아니라 전쟁 당시의 군사력과 체제 대결 결과와 관련한 발언이 사실과 달랐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27일 전국노병대회 연설에서 “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야수성”, “침략자들과의 싸움”을 언급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령과 로병들이 이런 미제로부터 북한을 “막아내고”,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한국전쟁을 북침으로 선전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수많은 역사 자료를 통해 북한의 남침임이 확인됐음에도 70년째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사실은 유엔과 서방세계뿐 아니라 1990년대 냉전 종식으로 옛 소련이 붕괴되면서 나온 많은 외교문서와 비밀 자료들에서 확인됩니다.

특히 1천 200쪽에 달하는 러시아대통령실 소장 문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1994년 크렘린궁을 방문한 김영삼 한국 대통령에게 제공한 300여 종에 달하는 문서에는 한국전쟁 준비 일정까지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자료에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옛 소련에 48번이나 남침 승인을 요청해 스탈린이 결국 이를 승인하고 중국의 마오쩌둥도 남침에 동의한 사실, 소련의 대대적인 무기 지원과 소련 군사 고문관들이 세운 작전계획에 따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냉전 직후 모스크바에서 한국전쟁 등의 역사 자료를 수집· 분석해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명하고, 미 윌슨센터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캐스린 웨더스비 아메리칸대 교수입니다.

[녹취: 웨더스비 교수] “Kim Il-sung was the initiator, initiating the idea pressing the Soviets to agree to it, but it was Stalin who made the decision.”

웨더스비 교수는 과거 서울에서 연 행사에서 김일성이 전쟁 개시자로 소련에 승인을 압박했고, 남침을 궁극적으로 결정한 당사자가 스탈린이었다는 사실은 옛 소련 문서들에 일관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 21명도 지난 2012년 공동 집필한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은 소련 붕괴 이후 옛 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이 확실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결론 내린 바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연설에서 “맨손으로도 총포탄을 만들어내는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전쟁은 넘볼 수 있는 상대와만 할 수 있는 무력충돌”이라며 과거 미제로부터 침략을 당했지만 “이제는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그 누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한다”고 말한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유엔과 옛 소련 문서들에 따르면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대부분의 주요 무기를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없어 소련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공부했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는 29일 VOA에, 과거 옛 소련 자료들을 분석하고 증인들을 면담한 결과 북한이 당시 만들 수 있는 무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란코프 교수] “다 거짓말입니다. 북한은 기관총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비행기, 탱크, 대포를 어떻게 보유할 수 있었을까요? 모든 것은 다 소련에서 받았습니다. 다 소련제입니다.”

란코프 교수는 북한은 당시 소련이 지원한 무기로 한국보다 훨씬 군사적 우위에 있었다며, 실제 전쟁으로 넘볼 수 있는 상대는 김 위원장의 말처럼 북한이 아니라 전투기와 탱크조차 전무했던 한국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국방부의 2018 국방백서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북한은 모든 전력에서 한국을 크게 압도했습니다.

전차(T-34 탱크)는 북한이 242대였지만 한국은 전무했고, 북한은 전투기와 전폭기가 211대였지만, 한국은 연습용 경비행기 22대가 전부였습니다.

박격포도 북한은 1천 728문으로 한국(960문)보다 2배 많았고, 대전차포와 곡사포도 각각 550문과 552문으로 한국보다 5~6배가 많았습니다.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등을 통해 한국을 외교적으로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으며,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한 뒤 수 백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긴 채 한국에 탱크와 전투기 등 주요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CIA보고서] The last US Army forces left South Korea on 29 June 1949. A small Korean Military Assistance and Advisory Group (KMAAG) of several hundred men replaced the former military force, but it denied the fledgling ROK heavy equipment, tanks, anti-tank weapons, and aircraft. In the north, however, the USSR provided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with large amounts of armor, artillery, aircraft, and other military equipment as well as training.

미국은 당시 한국에 중화력 무기를 제공할 경우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을 강행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지상군 병력은 9만 6천 명으로 19만여 명인 북한의 절반에 불과했고, 그나마 한국군 절반은 후방 공산세력 토벌에 투입돼 기습 남침을 막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허남성 석좌연구위원은 이 단체가 제작한 ‘6·25 전쟁의 개관’ 동영상에서 이런 군사적 열세 때문에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허남성 위원] “훈련조차도 우리 국군은 당시 중대급 훈련밖에는 못했습니다만 북한은 이미 사단급 훈련까지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일방적으로 내려 몰렸지만, 비교적 성공적 지연작전을 하면서 대략 7월 말쯤에는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고 그곳에서 약 한 달 반 정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낙동강 전투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이 “총이 부족해 남해를 지척에 둔 낙동강가에 전우들을 묻고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고 말한 것도 사실과는 차이가 납니다.

미국과 한국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낙동강 전투에서 완패하고 후퇴한 것은 유엔군의 참전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기밀해제된 미 CIA와 소련 문서들은 당시 유엔군이 경부선 철도와 도로를 파괴해 북한의 무기 보급로를 차단했고, 낙동강 전투에 대부분 병력을 투입했던 북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총이 부족해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는 김 위원장의 말은 부분적 팩트라는 게 란코프 교수의 지적입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한국전쟁 결과에 대해 “역사의 퇴물인 자본주의에 대한 인류의 미래인 사회주의의 승리였다”고 말한 것은 사실관계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지적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이제 지구상에 북한과 쿠바뿐이며, 중국과 베트남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용해 개혁·개방을 했지만 북한은 체제를 고수해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의 하나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유엔과 세계은행, 한국 통계청에 따르면 남한의 경제력은 2018년 GDP(국내총생산) 기준 북한의 53배, 기대수명은 한국인이

북한인보다 13살이 높은 등 국력과 삶의 수준 모두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지난달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 남북한 체제경쟁이 이미 끝났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녹취: 문재인 대통령] “6·25전쟁을 극복한 세대에 의해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습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7불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이 폐허에서 일어나 국민소득 3만 불이 넘는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 발전했습니다…우리의 GDP는 북한의 50배가 넘고, 무역액은 북한의 400배를 넘습니다. 남북 간 체제경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웨더스비 교수는 북한 당국이 이런 왜곡된 사실을 계속 주민들에게 교육하고 선전하는 것이 남북관계 개선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웨더스비 교수] “North Korea still maintains that the war began by the United States and the South invading the North, that is still what is put forward publicly. Most importantly, it is what people in North Korea are taught as they grow up,”

전문가들은 북한 수뇌부가 왜곡된 역사로 주민들에게 미국과 한국에 대한 증오를 계속 심으면서 평화협정으로 가기는 힘들다며, 북한 주민들이 먼저 역사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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