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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시민사회’ 태동 주목하고 지원해야”...‘엘리트 탈북민’ 제안


지난달 5일 평양에서 우산을 쓴 시민들.
지난달 5일 평양에서 우산을 쓴 시민들.

북한에서 당국의 통제를 벗어난 시장 활동이 늘어나면서 이전까지 철저히 금지됐던 ‘시민 사회’의 초기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금전적 이익을 매개로 한 인적 네트워크가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확대되고 있는 만큼, 이런 움직임에 대한 외부 지원이 절실하다는 주장입니다. 북한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중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탈북민의 제안을 백성원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미국 워싱턴 DC 인근에 거주하는 탈북민 이현승 씨는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인들의 “자각”이 우선적으로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평양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북한 엘리트 계층 출신인 이 씨는 최근 비정부기구(NGO) ‘글로벌피스파운데이션’ 웹사이트에 실은 기고문을 통해 아무리 외부 정보가 유입되더라도 자유와 인권을 찾으려는 주민 스스로의 노력이 따르지 않는 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이어 한반도 통일은 70년 넘게 분단된 두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정치적 변화이자 혁명이지만, 이 과정을 평화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북한 주민들의 인식 변화와 시민 사회(civil society) 형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시민의 힘을 통해서만 위대한 변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듯, 북한에서도 시민이 주도하는 단체가 조직되고 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것이 평화 통일의 기반이 돼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북한 내 소위 “사회 조직”은 북한 주민들의 뜻과 희망, 의지는 철저히 배제한 채 북한 정권과 노동당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고 있다며, 시민의 연대와 활동이 전무한 북한의 현실을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또한, 어떤 형태의 사적 모임이든 감시와 탄압의 대상으로 삼는 북한 정권의 폭압 정치 아래 대부분의 북한인들은 정권이 주도하지 않는 어떤 사회 조직도 만들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한계를 들었습니다.

동창회나 소규모 동아리마저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4명 이상의 모임은 보위부 요원들의 상시 감시 대상이 되는 데다, 대화 중에 정권에 대한 “중상”이나 김정은 일가에 대한 비판이 오갈 경우 3대 멸족 반역죄가 적용되는 극단적인 독재 체제 속에서 시민의 결속이나 연대는 그동안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북한 헌법 제67조에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지며 국가는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들이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고 돼 있지만 대부분의 북한인들은 헌법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전했습니다.

아울러 김씨 왕조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를 강제하는 노동당 10대 원칙이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을 제치고 북한 내부의 최고 통치 규범으로 주민의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점도 시민사회 형성의 한계로 들었습니다.

2014년 북한을 탈출해 2016년 미국에 정착한 이 씨는 8일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 정권은 김씨 일가의 안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비정치적 모임도 철저히 봉쇄한다며, 2005년 평양외국어대학교 재학 당시 조직했던 농구 동아리가 강제 해산됐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녹취: 탈북민 이현승 씨] “2005년 평양외국어 대학의 한 친구가 북한 인트라망을 통해서 농구 게임을 조직했습니다.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다른 대학에서도 모여 농구 게임도 즐기고 다른 대학 친구들도 알게 됐는데, 그다음 날 바로 국가보위부에서 이 인트라망 채팅방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이 사적인 모임이 국가와 지도부를 향하는 반란의 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어떤 사적인 모임, 또 개별적인 채팅이 불가능하도록 이런 것들을 다 차단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당국이 모든 종류의 사적 모임 기회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주민들은 시민사회에 대한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는 극도로 폐쇄된 환경, 그리고 삼중사중 중첩된 고도의 감시체계는 시민 사회 태동의 싹을 자르고 있다고 이 씨는 비판했습니다.

이 씨는 기고문에서 북한 정권의 극심한 통제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시민 사회 성장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엿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 정권이 통제하던 경제와 분배 체계가 무너지면서 생존을 위해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는 일반 주민들이 일종의 먹이 사슬을 형성하고 있는 점을 중요한 이유로 꼽았습니다.

동시에 외화 수입과 국내 소비에 맛을 들인 북한 경제 관리들이 통제를 완화하고, 고위층은 뇌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점차 정권의 철권통치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그런 배경으로 들었습니다.

노동당과 김씨 정권이 아닌 장마당과 대외 무역이 2천 500만 북한 주민들을 20년 넘게 먹여 살리면서, 북한인들은 자신들만의 생계 채널을 마련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조직하게 됐다는 설명입니다.

또한 시민들과 엘리트 계층 간의 상호 이익을 매개로 태동한 이런 “암묵적 네트워크(tacit network)는 북한 사회에서 시민의 활동과 시민 사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여기에 2008년 1만 명에 불과하던 북한 내 스마트폰 이용자가 10년 만에 6백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정보가 빠르게 유입되고 확산하게 된 점도 시민 사회 성장을 북돋우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씨는 북한 시민 사회의 확산을 위해선 관련 활동에 대한 지식을 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시민 활동의 개념과 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북한인들에게 시민 조직의 역할을 비롯해 비정부기구(NGO)의 운영, 관련 활동과 법적 근거를 교육하고 미국, 일본, 한국의 시민 사회 현황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또한 북한인들이 시민운동 단체를 조직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이런 활동을 통한 권리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북한의 계몽된 시민들은 국가가 통제하는 시장의 규칙에 만족하는 대신 장마당의 합법화와 권리를 요구하고, 무자비한 숙청의 대상이었던 엘리트 계층은 법과 공정한 재판 절차를 인지하고 이를 요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탈북민들은 대북 정보와 지식 전달의 중요한 자원이자 역할 모델이라면서, 이들을 북한 시민들과 연계해 북한 내 시민사회 구축을 주도하는 전략가와 행동가로 육성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씨는 VOA에 평화 통일의 대상은 북한 정권이 아니라 북한 주민이라며, 미국과 한국 등은 북한인들이 시민으로서 서로 연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탈북민 이현승 씨] “북한과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면 북한 사회의 진정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시민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민 사회를 만들려면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주고 그들이 자체적인 목소리를 내서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씨는 북한 내 비정부기구와 시민사회 구축을 위한 외부의 지원이 한반도 평화통일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가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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