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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6.25 한국군 포로 딸, 탈북자 백영숙 씨 "동생 입국 뉴스보고 알아"


중국 내 한국 공관에서 장기간 체류해온 6.25 전쟁 당시 국군포로 백종규 씨의 딸 백영옥 씨 가족 등 탈북자 5명이 지난 1일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백영옥 씨 가족은 지난 2009년 탈북한 이후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머물며 한국행을 기다려왔는데요. 지난 2004년 동생인 백영옥 씨보다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백영숙 씨를 전화로 연결해 소감 등을 들어보겠습니다.

문) 네, 오랫동안 동생 가족의 한국 입국을 기다리셨을 텐데, 지금 소감이 어떠신가요?

답) 지금,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지요. 제가 처음에 한국에 입국했을 때 그 기분이예요, 지금.

문) 네, 참 오랫동안 기다리셨을텐데요. 그동안 마음 고생도 많이 하셨을거고요.

답) 네, 마음고생을 많이 했죠. 항상 어깨에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그런 기분이었죠.

문) 동생분이 처음에 3년 전이죠? 중국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들어간게요?

답) 네.

문) 그 때만 해도 곧 본인처럼 한국으로 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셨을 텐데, 3년동안 시간이 꽤 많이 지나갔습니다.

답) 네, 그랬죠.

문) 이번에 동생 가족이 한국에 입국했다는 소식, 언제, 어떻게 듣게 됐는지 설명좀 해주시죠?

답) 한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은 제가 뉴스 나기 전, 9시 뉴스인데요, 9시 뉴스 5분 전에 KBS기자분이 저한테 문자가 왔더라고요. 동생분이 한국에 오셨다고요. 그래서 저도 문자를 잘못 봤나 하고 다시 눈여겨 보다가 TV를 딱 켰는데 뉴스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집안에서 혼자서 너무 좋아가지고 펑펑 뛰었어요.

문) 언니한테도 한국에 들어올 때 까지 얘기를 안해준거군요?

답) 안했지요.

문) 굉장히 조심했단 얘기군요? 동생분 포함해서 이번에 탈북자 다섯명이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족일이니까요, 어떻게 성사가 됐는지 알고 계신가요? 그동안 사실 오랫동안 기다렸고 중국 정부에서 출국 허가를 안해준다는 얘기가 많았는데요?

답) 저도 3년동안, 처음에는 저처럼 늦어도 한 3개월이면 오겠지, 하고 생각했는데요. 그래도, 한 1년 정도 돼도 안오니까, 저도 제 나름대로 좀 노력을 했어요. 했는데, 영사관에 들어가면 중국정부가 아니까, 거기서 뒤로 빼내오거나 이러면, 저도 NGO 단체라던가 이런 단체들에 많이 문의도 했고요, 그리고 국방부에다도 또 여러 번 문의도 했고요, 그리고 또 인권위원회에다 또 서류를 넣어서 봐 달라고 신청을 했고요, 여러 번을 했는데, 다 안됐어요. 그래서, 제가 도저히 3년이라는 세월이 됐기 때문에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이명박 대통령님 한테 제가 이메일로 편지를 보냈어요.

문) 그게 언제인가요?

답) 그게 지금, 2월에. 그래 보냈고, 그리고 납북자 국군포로 최성용 대표라고, 그분한테 조언을 좀 했어요. 도와달라고. 그래서, 그분이, 아니 그분도 신문을 보고 알았대요. 인권위원회에 난 신문보고. 그리고,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 3년동안 어떻게 안올 수 있는가, 하고. 그리고 그분이 나서서 같이 정부측에다 요구를 했고, 그래 한거예요.

문) 네, 한국 정부에서 어째든간에 노력을 해서 된 걸로 알고 계신건가요?

답) 네, 그래요.

문) 네, 그동안 사실 3년동안 동생분도 계시고 동생분 어린 자녀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에 오시게 된 가족들이요? 동생분들하고 그동안 베이징에 계실 때는 연락을 계속 하셨죠?

답) 네, 이따금씩 했어요. 연락을.

문) 만나지는 못하셨고요?

답) 한 번도 못봤지요.

문) 이번에 서울 도착한 다음에 연락이 됐나요?

답) 아직도 연락은 안됐어요.

문) 아, 그냥 왔다는 소식만 뉴스로 알고 계신거군요?

답) 네, 소식만 듣고요.

문) 굉장히 궁금하시겠습니다.

답) 네, 궁금하지요.

문) 네, 지금 도착한지 한 이틀 된건가요?

답) 네, 이틀됐어요.

문) 네, 그동안 베이징에 머문 과정을 좀 여쭤보겠습니다. 본인도 베이징을 거쳐서 오셨고, 동생 가족이 지난 3년 동안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머물면서 한국행을 사실은 기약없이 기다려 온건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다고, 그 동안 통화 하실 때는 얘기를 하던가요?

답) 영사관에 들어가면, 정부측에서는 잘 해줘요. 정말 잘 보살펴도 주고, 이러는데 오지 못하니까, 어째든 좁은 공간에 있으니까. 한창 공부할 나이의 아이들이 공부도 못하고 있고, 공부를 배워는 준다고 해도 그래도, 학교 다니는 거랑 또 다르잖아요. 그리고, 어째든 안에 있으니까, 빨리 와야겠는데 오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울증이 막 오죠. 그리고 심장이 막 벌렁거리고. 그래가지고 우리 동생이 하소연 많이 하더라고요.

답) 그렇군요. 백영숙씨, 백영옥씨 두분 자매의 얘기가 언론의 관심을 받는 이유중의 하나가 6.25 전쟁 때 한국군 포로, 아버님이죠? 백종규씨의 두 따님이거든요? 사실 북한에 계실 때 한국군 포로 자녀로 생활을 하셨는데, 어려운 점이 많으셨을 것 같기도 하고요. 북한에서 생활은 어떠셨나요?

답) 북한에서는, 탄광에서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탄광에서 있었잖아요. 그런데, 자식들이 출세를 못해요.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그리고 또, 가정적으로 결혼을 해도, 배우자를 좋은 사람을 선택하제도, 아버지가 국군 포로라는 이유로 그런 선택도 좀 못하고요. 어째든 이모저모로 모든 게 걸림돌이 되지요.

문) 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백영숙씨 본인도 2004년 4월 한국에 들어오셨는데, 입국 과정이 쉽지 않으셨죠? 어떻게 입국을 하셨고, 지금 어떻게 지내시는지, 한국에서. 좀 설명을 해주시죠?

답) 입국할 때는 저도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고향을 그립고, 그래서 통일이 되면 죽어서라도 내 고향땅에다 나를 묻어달라, 우리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살아계실 때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으로 오려고 결심 하고, 아버지를, 유해를 모시고 오게 됐고요, 지금 현재는 서울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문) 네, 잘 살고 계시는군요. 저도 화면에 비친 얼굴 보니까 입국하실 때 보다 더 얼굴이 좋아지시고 뵙기에 좋으시더라고요.

답) 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조카가 저보고 그래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그 모습하고 사진을, 신문을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아니 이모가 너무 북한의 모습하고 달라졌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너네도 한국에 오면 이모처럼 다 달라진다, 내가 이렇게 말을 했어요.

문) 예뻐지셨다 이런 말씀을 많이 들으시죠?

답) 네, 많이 들어요.

문) 정말 오랜 기다림 속에 동생 가족분들을 곧 만나게 되실 텐데, 제일 먼저 어떤 얘기 해주고 싶으시고, 또 같이 무얼 하고 싶으세요?

답) 제일 먼저는, 고생을 했고, 그리고 하고싶은거는, 제일 먼저 하고싶은건, 아버지, 현충원에 가서 아버지를 찾아뵙고, 그리고 아버지 고향에 가서, 아버지가 항상 그리던 고향, 청도에 가서 한번 둘러보고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모르잖아요. 그리고 우리 동생도 모르니까. 일단은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서울 시내 구경을 한 번 시키고, 그리고 조언을 주고 싶은 거는 우리 동생한테 대한민국도 자유민주주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배우고, 그래야만 그리고 건강하고,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조언을 주고 싶어요.

진행자) 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난 2004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국군포로의 딸 백영옥 씨로부터 최근 동생 가족이 한국에 입국한 데 따른 소감 등을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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