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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인물 아메리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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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대해 알아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매년 2월 세째주 월요일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업적을 기리고 자유 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는 연방 공휴일입니다. 원래 이 날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생일을기념하기 위해 시작됐으나 차차 모든 대통령을 기리는 날로 확대됐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을때 오합지졸을 이끌고도 고도로 훈련된 영국군에 승리를 거둔 점, 그후에는 초대 대통령이 돼서 오늘 날 세계에서 가장 잘 운영되는 민주주의 나라를 만드는데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6남매 중 세째 아들이었습니다. 첫째 둘째는 배다른 형이었고, 아래로는 여동생이 한명 남동생이 두명 있었습니다. 조지가 11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복 형이 집안을 이끌어 갔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습니다. 철학, 역사 등 여러 분야를 공부했고, 기술, 회계 등 실무적인 것도 많이 배웠습니다. 워싱턴은 책을 특히 많이 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지는 젊었을때부터 측량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처음 직업도 측량기사였습니다. 군인에 대한 동경심도 많았습니다. 버지니아 민병대 지휘관이었던 이복 형이 말을 타고 군복을 입은 모습을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결국 조지도 21살때 버지니아에 민병대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미국 대륙에서는 '프랑스 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으로 불리우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북미 대륙에 땅을 차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가 영토확장 때문에 자주 충돌하고 있었고 두 나라 군대는 서로 토착 원주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싸움을 벌였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 지휘관의 참모로 복무했습니다. 프랑스 편을 드는 인디언 부대와 20번의 격렬한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워싱턴은 약 5년간 민병대 복무를 마치고 마운트 버논 집으로 돌아와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라는 미망인과 결혼했습니다.

1770년대 미 대륙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이른바 대륙회의 (Continental Congress)가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13개 식민지 주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로, 여기서 영국과 전쟁을 하기로 결정이 나고 워싱턴에게 독립군을 지휘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몬머스 전투에서 군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조지 워싱턴.
몬머스 전투에서 군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조지 워싱턴.

워싱턴은 미국이 공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기 한해 전인 1775년에 식민지군 총사령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때 나이 43세. 사령관 월급은 사양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반드시 독립을 해야 한다, 또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과 확신을 가진 지휘관이었습니다. 또 사기가 떨어진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당시 신생 국가 미국은 각각 독립된 주가 느슨한 연합체제를 이루고 있었을 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금, 병기, 식량, 보급품 등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군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던 지원병들이라 훈련 잘 안돼 있었고 복무 기간도 들쭉 날쭉이었습니다.

반면 당시 영국군은 정예 부대로 소문난 군대였습니다. 그런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보니 워싱턴은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워싱턴은 좌절하지 않고 과감한 공격, 예상치 못한 기습을 감행해 영국군의 허를 찔렀습니다.

약 8년 동안 계속된 전쟁 중에 특히 중요한 전투는 1776년 12월에 동북부 뉴저지 주의 주도 트렌튼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비교적 소규모 전투였지만 독립전쟁의 전세를 뒤바꾸는 계기가 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영군군은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식민지 주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필라델피아까지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워싱턴이 크리스마스 다음날 새벽에 기습해 격파한 전투입니다

늘 패하기만 하던 식민지 군대가 처음으로 이기자 혁명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전을 치른 곳은 버지니아 식민지 동해안에 접한 요크타운이었습니다. 혁명군과 영국군은 약 8천명씩의 병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크게 패해 워싱턴에게 항복했습니다.

독립전쟁에서 이겼으니 이제는 국가 체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공화제를 한다고들 하지만 도대체 왕이 없이 국민들이 합의해서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모두들 큰 의문이었습니다. 13개주 대표 55명은 뉴욕에 모여 제헌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는 대통령 임기를 정하는데 60번이나 표결을 해 겨우 통과될 정도로 혼란했습니다. 끝 없이 논쟁만 계속되자 대의원들은 조지 워싱턴을 불러 의장으로 추대했습니다. 집에서 쉬던 워싱턴은 다시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워싱턴에게 왕으로 등극을 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영국 왕에 항거해 싸웠는데, 다시 이 땅에 왕을 만들어야 되겠냐”고 크게 화를 내곤 했습니다.

왕은 아니지만 결국 워싱턴은 만장일치로 새로운 나라의 수반, 즉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역사상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1789년 4월 30일 워싱턴은 마운트 버논에서 말을 타고 뉴욕까지 가서 취임식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워싱턴 DC가 연방 정부의 수도로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아직 도시가 건설 중이어서 뉴욕에서 취임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워싱턴은 미국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백악관에서 살지 못한 대통령이 됐습니다.

워싱턴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된다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왕이나 독재자가 통치할 수 없도록 하는데 노력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드는 한편 국무부, 연방 대법원 등을 만들어 3권 분립을 단행했습니다.

워싱턴이 취임했을 때 미국은 장래가 불투명한 허술한 나라였지만 퇴임할 때는 국제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돼 있었습니다.

워싱턴이 존경 받는 많은 것 중에는 대통령 임기를 2차 연임으로 끝내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3차 연임을 하라, 심지어는 종신 대통령으로 있어달라는 요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은 내가 더 연임을 하게 되면 후대에도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면서 단호히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사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 임기를 두 차례로 제한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은퇴 후 마운트 버논 집으로 돌아온 워싱턴은 방문객들도 만나고 농장 관리도 하면서 바쁘게 보냈습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1799년 12월 12일, 농장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감기 같은 증세로 앓아누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67세였습니다. 의사들은 후두개염이라는 증세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그의 정확한 사인은 규명되지 못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마운트 버논의 포토맥 강 가 안치소에 부인 마사의 석관과 함께 나란히 누어있습니다. 친구이자 같이 싸움터를 누볐던 리차드 헨리 리의 말처럼 조지 워싱턴은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국민의 마음 속에도 으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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