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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공동성명 40돌 '아직도 먼 남북화해'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한 당국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분단 이후 처음 합의한 성명을 발표합니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불리는 이 문건에는 자주적, 평화적,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 중상비방과 무력도발 중지, 다방면의 교류, 적십자회담 성사, 서울-평양 직통전화 개설 그리고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 화해 협력 조치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군사적 대결 국면이 지속됐던 당시로선 획기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앞서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그리고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극비리에 방문하는 등 물밑 협상의 결과였습니다.

7.4 공동성명이 성사된 것은 당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조성된 긴장완화 즉 데탕트 바람의 영향이 컸습니다. 두 강대국의 긴장완화는 이들의 동맹국인 남북한 사이 화해 분위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한의 의도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데탕트 바람을 주한미군 철수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고 북한대학원대학교 신종대 교수는 분석했습니다.

[녹취: 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주한미군 철수 이런 것들을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하고 대화하는 국면에서 하나의 안건으로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대화에 응하게 됐던 거죠”

북한의 의도가 그랬기 때문에 성명은 곧바로 실효성을 잃게 됩니다. 통일 원칙에 대한 해석을 놓고 갈등만 커졌습니다.

북한은 자주와 평화 원칙을 즉각적인 주한미군 철수와 군축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반면 한국측은 경제 문화 교류 등으로 신뢰를 쌓은 뒤 단계적으로 군비를 축소하자고 맞섰습니다.

민족대단결 원칙에 대해서도 한국측은 민주화와 인권보장을 강조했고 북한은 국가보안법 철폐와 민주인사 석방을 주장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성명은 남북 화해 메시지를 담았지만 발표 이후 양쪽 집권층은 경쟁적으로 권력 강화에 나섭니다. 그 해 12월 북한은 주체사상과 주석제를 집어넣은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었고 한국에선 박정희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준 유신헌법을 채택했습니다.

결국 7.4 공동성명은 남북 화해로 연결되지도, 북한의 의도대로 활용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의미는 작지 않다는 평가입니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입니다.

[녹취: 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남북한이 처음으로 무력이 아닌 상호 협력과 평화적 방식으로 통일을 모색하는 공존의 실험 또는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그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4 공동성명 이후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남북간 교류와 접촉이 늘었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나 2000년 6.15 공동선언 그리고 2007년 10.4 선언 등 차례로 이어진 남북 합의들도 7.4 공동성명이 기초가 됐다는 평가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한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7.4 공동성명에 대한 관심도 줄었습니다. 고려대 북한학과 임재천 교수입니다.

[녹취: 임재천 고려대교수] “핵 문제를 통해서 더 이상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이런말은 거짓이라는 게 서서히 드러나고 있고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등의 북한의 행태 이런 것이 남북간 불신을 특히 남한 주민들로부터 더욱 더 큰 불신을 받게 된 증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4일 7.4 공동성명을 김일성 주석이 쌓은 ‘조국통일의 초석’이라고 선전하면서 미국과 한국의 북침 전쟁 도발 책동으로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성명 이전보다 더 험악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울에서 미국의 소리 김환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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