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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공동선언 10주년-냉전시대로 돌아간 남북관계


오늘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6.15공동선언을 채택한 지 꼭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실험에 천안함 사태마저 겹쳐 냉전시절로 돌아간 느낌인데요. 최원기 기자와 함께 지난 10년 간의 남북관계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문) 6.15 공동선언이 나온 지 벌써 10년이 됐군요?

답)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만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두 정상은 이틀 간의 회담 끝에 남북 화해와 협력을 다짐하는 6.15 공동선언을 채택했는데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목소리를 한번 들어보시죠.

“(김대중)겨레의 뜻을 모아 북녘 땅을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김정일)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데, 그런데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문) 6.15 선언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좀 설명해주시죠.

답)네, 6.15 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이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해 합의한 5가지 방안을 정리한 것인데요. 우선 통일 방안을 검토하는 한편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협력을 가속화 하고, 남북대화 정례화,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문) 실제로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에는 교류, 협력이 크게 늘지 않았나요?

답) 사실입니다. 남북 간에는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장관급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 경제회담 등 각종 대화와 접촉이 활성화 됐습니다. 또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등 경제협력 사업은 물론 남북 철도와 도로 연결 사업도 논의됐습니다. 이산가족 상봉도 활성화 돼, 2000년부터 2005년까지 12차례에 걸쳐 1만2천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이 만났습니다.

문)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은 이뤄지지 않았죠?

답)네, 6.15 공동선언이 모두 이행된 것은 아닙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신변안전’ 등의 이유를 들어 끝내 남한 답방 합의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문) 6.15 선언의 진전을 가로막은 것은 역시 북한 핵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어떻습니까?

답)네, 6.15 공동선언이 나온 2000년은 미국과 북한 간에 제네바 합의에 따라 경수로 사업이 진행될 때입니다. 따라서 미-북 간에는 특별히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지난 2002년10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6.15 선언은 다소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의 말을 들어보시죠.

“제일 큰 원인은 북한 핵 문제죠.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문제가 영향을 줬죠.”

문) 한국에서는 2003년2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물러나고 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출범했는데요. 6.15 선언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 기조가 유지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답)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남북 화해와 협력이라는 6.15 선언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05년에는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을 결합한 개성공단이 가동됐습니다. 또 2007년에는 남북 경의선 철도 운행도 시작했구요. 특히 남북 경제협력이 활발히 진행돼 지난 2000년에 4억 달러에 불과했던 남북 교역이2007년에는 그 4배가 넘는 18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문)10.4선언도 6.15 선언의 후속판으로 봐야 하겠죠?

답)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에 평양에서 만나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10.4 선언을 채택했는데요, 이 선언 역시 남북 화해와 협력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발표를 들어보시죠.

“상봉과 회담에서는 6.15 공동선언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를 위한 제반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다.”

문) 그런데 2008년에 한국에서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면서 6.15 선언은 퇴색하는 것 아닌가요?

답)그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지난 2008년에 보수 성향인 한나라당의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출범했는데요. 이명박 대통령은 전임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선 핵 폐기, 후 남북관계 개선’을 정책 기조로 삼았습니다. 또 이른바 `퍼주기식’ 대북정책이 아니라 보다 `균형 잡힌’ 새로운 대북정책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의 핵실험과 돌발 사건, 그리고 천안함 사건 등이 겹쳐 남북관계는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문) 하나씩 짚어봤으면 좋겠는데요. 먼저 어떤 돌발 사건이 남북관계를 후퇴시켰습니까?

답)2008년 7월11일 발생한 남한 관광객 금강산 피격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날 아침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한국의 50대 여성 관광객이 북한 군 병사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에서 6.15 선언과 10.4 선언 이행을 위해 북한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총격 사건이 나면서,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의 말을 들어보시죠.

“박왕자 씨 2008년 7월 피격 사건도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명박 정부가 과거와 달리 전향적으로 나가겠다고 표명해왔는데, 이런 사건으로 인해 유연한 대응을 하기가 어려워졌죠.”

문)지난 해 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은 남북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죠?

답)그렇습니다. 북한은 지난 해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데 이어 5월에는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의사를 밝혔고 북한은 이에 ‘한국 정부가 조선반도를 전쟁 상태로 몰아넣었다’며 정전협정의 무효화를 선언했습니다. 북한 군부는 이어 올해 1월에는 한국 이명박 정부에 대해 전면적 대결태세를 선언했습니다. 당시 북한군 총참모부의 발표를 들어보시죠.

“외세를 등에 업고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부정하고 대결의 길을 선택한 이상 우리의 혁명적 무장력은 그것을 짓부수기 위한 전면대결 태세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문) 그렇다면 북한 군은 자신이 경고한대로 천안함을 공격한 것인가요.

답)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 됐습니다. 북한은 지난 3월26일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초계 활동 중이던 한국의 1천2백t급 천안함을 어뢰로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해군 장병 4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한국 이명박 대통령은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천안함 사건으로 그나마 유지되던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가 됐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미 서부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드 강 한국학 연구소장의 말을 들어보시죠.

“데이비드 강 교수는 남북관계가 냉전시절로 복귀했다며, 남북이 상대방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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