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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특집 시리즈 3]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산가족과 미군 실종자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1주년이 됐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부터 5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소원은 풀었는데 앞으로 기약이 없어.”

“아버지, 통일 되는 날까지 살아 계세요.”

지난 해 11월 추석을 맞아 금강산에서 만난 남북 이산가족들이 기약 없는 이별을 합니다. 60년 가까이 헤어졌다 다시 만난 가족들에게는 2박 3일의 만남이 너무도 짧습니다.

하지만 이런 야속한 만남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건너온 이산가족들입니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김만종 씨는 1946년 가족과 헤어진 뒤 최근에야 동생들로부터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실 적에 우리 여동생하고 남동생을 앞에 놓고 내가 세상을 뜨더라도 오빠, 형님을 꼭 만나야 된다 하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더 마음이 괴로웠죠”

김 씨는 해방 뒤 북한 당국으로부터 불순분자로 지목 받자 가족과 상의한 끝에 23살의 나이에 혼자 월남했습니다. 곧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고 떠난 길이었지만 결국 88살이 되도록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이산가족들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제외돼 왔습니다. 한국이 아닌 미국 시민권자들이어서 국적상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정부가 주선하는 이산가족 상봉 역시 미국과 북한의 공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결국 중개인들을 통해 북한을 직접 방문하는 방법 밖에 없지만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재미 한인 이산가족 상봉추진위원회의 이차희 사무총장입니다.

“이산가족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 정부나 누구의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야겠다는, 소식을 알아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저쪽에서 요구하는 돈을 다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가서 보면 그게 아닌 거예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 확인만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지만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은 10~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70살 이상 고령입니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이산가족 중에 제가 아는 분들이 거의 다 돌아가셨어요. 제가 부고를 받을 때마다 이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없는데. 이 분들은 그래도 죽기 전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한번 자식들을 만나자, 가족들을 만나자, 이런 희망을 갖고 있는데. 그런 희망을 버리시라고 그럴 수도 없고.”

이산가족들의 이런 안타까운 사정을 접한 미국 의회는 지난 2009년 말 국무부가 고위급 특별대표를 선임해 이산가족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필요할 경우 이 문제를 전담할 조정관을 임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국무부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는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시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도우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 적십자사, 국제적십자사와도 계속 논의하고 있고, 미국 적십자사도 국제적십자 총회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제기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북한 정부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고 북한 측에도 계속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이산가족들 못지 않게 헤어진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남편과 자식, 아버지를 전쟁터에 보낸 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올해 66살의 진 브라운 씨. 브라운 씨는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지금까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이 90살 가까이 사셨기 때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최소한 아버지가 어떡하다 실종됐는지 만이라도 밝혀졌으면 좋겠어요. ”

브라운 씨 가족에 비하면 그나마 유골을 찾은 무어 씨 가족은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해롤드 무어 미 육군상병이 지난 2일 마침내 조국의 땅에 묻혔습니다. 미 육군 제8기갑연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무어 상병은 1950년 북한 운산 지역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무어 상병의 유골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미군 당국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실종자 담당국의 래리 그리어 공보실장입니다.

“전우를 전쟁터에 두고 오지 않는다는 건 미군이 갖고 있는 약속이자 신조입니다. 미군은 60년이 지난 한국전쟁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 발굴작업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군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을 위한 실무작업은 하와이의 합동전쟁포로. 실종자 확인사령부가 맡고 있습니다. 유전자 검사와 관련 자료 분석,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의 신원을 1차적으로 파악한 뒤 유가족들의 유전자 검사와 비교해 최종적으로 신원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난1982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1백60 여 구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미군이 8천 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직 갈 길이 먼데다, 그나마 북한에서 이뤄졌던 유해 발굴 작업도 6년째 중단된 상태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다돼가지만 전쟁의 상처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이산가족과 실종미군 가족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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