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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특집 시리즈 1] 분단을 고착시킨 1127일 전쟁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1주년이 됐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부터 5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김현숙 기자가 ‘분단을 고착시킨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내드립니다.

지난 1950년8월12일, 한국군 1사단 12 연대장이던 김점곤 중령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8월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북한 인민군 3개 사단이 대구에서 북쪽으로 22킬로미터 떨어진 다부동을 방어하던 한국군 1사단을 공격해온 것이었습니다. 김점곤씨의 말입니다.

“8월15일까지 전쟁을 끝내라는 것이지요. 거기까지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동력을 발휘해서 점령하면 미국이 개입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3사단, 13사단, 15사단 등 2만명의 병력과 6백70문의 야포로 다부동을 거세게 밀어 부쳤습니다.

당시 1사단은 학도병 5백여명을 포함해 7천6백명의 병력밖에 없었습니다. 야포도 북한군의 3분의1에 불과한 1백70문밖에 없었습니다. 병력도, 화력도, 보급도 모든 것이 열세였습니다.

김점곤씨는 8월15일이 다부동 전투의 절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국군과 인민군이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총을 쏘지 못하고 여기저기 뒤엉켜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전개된 것입니다. 다시 김점곤씨의 말입니다.

“백병전했죠. 소총을 유효하게 잘 못썼어요. 그래서 중대장이, 농촌에서 온 병정들이 수류탄을 못 던지니까, 중대장이 하루 종일 수류탄을 던져서 어깨가 부어서 던지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니까”

1사단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다부동을 잃게 되면 대구가 떨어지고 그러면 낙동강 방어선 무너져 부산 함락이 시간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1사단은 사력을 다해 북한군 3개 사단을 물리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성공합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임진강 근처 문산을 지키던 1사단이 낙동강까지 밀려 온 것은 북한의 기습 남침 때문이었습니다. 6월25일 새벽 4시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해 왔습니다. 개성과 문산 일대를 지키던 1사단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1사단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한강을 넘어 남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책을 쓴 연세대학교의 박명림 교수는 한국전 초기의 이 같은 전쟁 양상은 6.25가 북한의 남침이었다는 확실한 근거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개전과 동시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진을 해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만일 남한군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한 전쟁이라면 3일만에 자기 수도를 점령당할 수는 없었죠”

한국전의 또 다른 분수령은 인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는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민군은 서울은 물론 대전, 광주, 청주, 전주,목포 등 남한의 9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전세를 역전시키자는 것이 맥아더 원수의 전략이었습니다. 과거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했던 도널드 그레그씨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작전이 커다란 ‘전략적 도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맥아더 원수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그 동안 수세였던 한국전을 공세로 전환하는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말했습니다.”

9월15일 새벽 6시 맥아더 원수는 전함 3백 척과 한-미 해병을 동원해 인천 상륙에 성공했습니다. 작전 개시 하루 만에 인천을 점령한 미-한 유엔군은 경인 국도를 타고 서울로 진격,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미-한 유엔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은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인민군 전선 사령관이었던 김책은 조치원을 통해 38선 이북으로 탈출했습니다. 나머지 인민군 패잔병들도 총을 버리고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피난민 틈에 끼어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김점곤 중령이 소속된 1사단은 10월1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섭니다. 미군과 함께 파죽지세로 북진한 11사단은 10월 19일 마침내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인민군 총사령관이었던 김일성은 사흘 전에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통일의 꿈을 안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1사단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정체불명의 대군과 조우합니다. 중국군이었습니다. 중국군은 이미 10월13일 압록강을 넘어 수십만이 산중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1사단은 전투 과정에서 중국군 포로를 잡아 이 사실을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원수는 이 정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의 말입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맥아더 원수가 그 해 연말까지 한국전을 끝내겠다는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일선에서 올라온 정보 보고를 무시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군의 참전은 한국전의 흐름을 180도 바꿨습니다. 압록강 수풍댐을 향해 북진하던 1사단과 미군은 후퇴를 개시해 11월 28일 청천강을 건너, 평양을 버리고 다시 남진합니다.

미군과 중국군은 그 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공방을 벌입니다. 양측은 한차례씩 서울을 뺏고 빼앗기며 공방 벌였지만 전선은 대체로 38선상에 머물고 맙니다. 또 전투는 고지 쟁탈전 양상을 띄며 지루하게 전개됩니다.

1951년 6월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표는 휴전회담을 제의합니다. 그러자 미국은 이를 받아들여 7월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열립니다. 그 후 미국과 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대표는 2년간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인 결과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마침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됩니다. 1127일에 걸친 한국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3년1개월간 전쟁을 치렀던 김점곤씨는 막상 휴전이 이뤄지자 허탈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을 한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허탈하죠. 뭐라고 간단히 감상을 얘기하기가 곤란합니다”

한국전쟁은 당시 독립한지 2년밖에 안된 남북한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남북한은 6.25를 겪으면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2백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또 산업시설은 80%이상이 파괴됐습니다. 다시 박명림 교수입니다.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해서 유엔군은 70만6천3백60명의 인명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이에 맞선 공산군은 인민군과 중국군을 합쳐 2백만3천5백명의 인명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양쪽 모두를 합쳐 무려 2백80만명이 인명피해를 봤습니다”

한국전의 가장 큰 비극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 분단을 고착화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남반부를 해방시킨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을뿐, 남북 분단은 반세기를 넘어 60년 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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