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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건 다시 보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3)


/// Act 1 정성윤 교수 /// “ 존슨 대통령에게 푸에블로호 사건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당시의 어떠한 정치적 상황, 심지어 월맹군의 구정 대공세보다도 더 심각하게 받아 들였다.”

(해설) 안녕하십니까, ‘다큐멘터리 – 사건 다시 보기’의 김정우입니다.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소 정성윤 교수의 말처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괴롭힌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미국과 북한간의 11개월에 걸친 지루한 협상 끝에 평화적으로 해결됐습니다. 우리는 보통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분석해 보고,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찾는 노력을 합니다. 물론 이 푸에블로호 사건도 예외는 아닐텐데요, 그렇다면 먼저 이 사건을 통해 미국 정부는 어떤 특징을 보여줬는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일민국제관계연구소 정성윤 교수는 이와 관련해 먼저, 미국 측 인사들은 공통된 신념체계와 경험으로 무장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 Act 2 정성윤 교수 /// “첫째는 미국은 사건 발발 초기에 북한이 단독으로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당시에 미국의 정책결정자 그룹들은 철저하게 공통된 신념체계와 공통된 경험으로 무장해 있었다. 그래서 미국 측 입장에서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국제공산주의자들의 협력 게임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당연히 정책 결정자들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협력의 일환으로서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다고 상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해설) 미국은 푸에블로호 나포가 북한을 비롯한 소련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협력해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북한과 협상에 나서기 전까지 미국 정부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성윤 교수는 다음 두번째 특징으로 미국 정부는 당시 한반도에서 새로운 위기를 만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무력사용을 자제하고 협상에 나섰다고 지적합니다.

/// Act 3 정성윤 교수 /// “두번째 특징으로는 당시 존슨 행정부는 한반도에서 지나치게 안보 위기가 고조돼 동북아에서 세력 재편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사건 발발 직후에 미국의 무력이 일정 정도 수준 이상으로 증강되는 것을 억제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또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당시 존슨 행정부는 미국 국내정치의 복잡한 상황 전개로 인해서 상당 부분 행동에, 즉 운신에 구속을 받고 있었다. 요런 것들이 존슨 행정부의 정책결정자들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무력조치와 같은 강경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게 하는데 조금 제약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라고 본다.”

(해설) 미국 정부는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였다고 믿었고, 월남전을 비롯한 국내 사정 때문에 북한에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북한 측은 어떤 특징을 보였을까요? 정성윤 교수는 첫번째로 북한은 이 사건에서 시종일관된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합니다.

/// Act 4 정성윤 교수 /// “북한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한 정도의 일관적인 태도로서 협상에 임했다. 북한은 5차 협상부터 세가지 A라는 요구를 미국에 요구해 왔구요, 어떠한 경제적인 보상이라든가 반대급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해설) 북한은 미국 측에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이의 재발 방지를 보장하라는 세가지 A요구를 고수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정성윤 교수는 두번째로 이 사건으로 북한은 자신들이 내세우던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국제관계에 적용시켰다고 지적합니다.

/// Act 5 정성윤 교수 /// “ 결국은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말미암은 대외적 자주 노선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함정을 독자적 판단 하에 나포함으로써 북한의 자주 노선, 이 주체사상을 통한 자주노선의 외교전략이라는 것이 국제적으로 처음 등장한 사건이 아닌가 한다.”

(낭독 1) 미국을 불굴의 용기로 굴복시킨 것은 오로지 주체사상 덕분이다. 미국은 사과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북한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이는 조선 인민들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해설) 푸에블로호가 송환된 다음 발표된 평양 라디오의 이 같은 보도를 들으면 북한은 이 푸에블로호 나포와 송환 협상을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데 이용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사실 11개월 간 푸에블로호를 억류하는 동안 북한을 비롯해 해외에서도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된 선전선동 작업에 주력합니다. 일민국제관계연구소 정성윤 교수는 마지막으로 북한은 이 사건을 통해 통미봉남이라는 전형적인 전략을 확립한다고 지적합니다.

/// Act 6 정성윤 교수 /// “북한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장기적으로 만나고 그리고 적지 않은 회수의 경험을 쌓음으로써 오늘날 소위 말하는 통미봉남, 즉 한반도나 전세계적인 안보 이슈와 관련해서 당사자인 한국과 대화를 하기 보다는 미국과 직접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외교정책적 전략을 획득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Bridge Music 2

(해설) 신라대학교 사학과 김정배 교수는 이 푸에블로호 사건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간의 이념 대결이 한창이던 냉전 시기에 일어났지만, 이 사건을 해결할 당시 미국과 소련의 자세를 보면 푸에블로호 사건이 과연 냉전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김정배 교수는 냉전 체제의 두 기둥인 미국과 소련은 이 시기,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려는 것 보다는 기존 영역을 유지하는데 전념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은 미-소 양국이 냉전 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면 서로 협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라고 지적합니다.

/// Act 7 김정배 교수 /// “푸에블로호 이 사건도 냉전에서 데땅트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시기 때문에 소련과 미국의 협조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그거 보다는 2차 대전 이후의 전후 질서 자체가 사실은 원래 이렇게 미소간의 경쟁과 협력, 그리고 진영 내부의 균열, 이런 것들, 그러니까 오히려 미국과 소련은 어떤 측면에서 같은 입장이 더 많았다면, 중국과 제3세계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68년의 이 사건을 이념적인 구도에서 탈피해서 바라보면 요 시기에 있어서의 다양한 문제들을 조금 더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해설) 역사에 많은 교훈을 주면서 끝이 난 푸에블로호 사건. 다음 주는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마지막 편으로 북한에 억류돼 11개월간 갖은 고초를 겪었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다큐멘터리 – 사건 다시 보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의 마지막 편, 많이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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