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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탈북 난민 100명 시대 특집] 데보라 씨의 도전 (1)


미국 내 탈북 난민 1백 명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지난 2004년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난민 지위를 받아 제3국에서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지난 9월 말 현재 93명으로 이르면 올해 안에 1백 명을 넘어설 전망입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는 탈북자 1백 명 시대를 맞아 오늘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특집방송을 보내드립니다. 오늘과 내일은 첫 순서로 지난 2006년 처음으로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 데보라 씨의 정착생활을 소개해 드립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 2006년 5월,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 다소 긴장된 모습의 남녀 6명이 환영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미국 의회가 북한 내 인권 향상과 제3국 내 탈북자 보호를 위해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이 서명한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탈북자 6명이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것입니다.

대부분 20~30대인 이들 6명은 입국 며칠 뒤 워싱턴에서 가진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단독 회견에서 새로운 땅에 도착한 소감을 털어놨습니다.

“ 중국에서처럼 언제 잡힐까 이런 불안감이 없이 자유를 찾았다는 게 되게 기쁘구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나 다른 나라예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철천지 원수라고 가졌던 생각이 싹 무너져버리고 북한의 모든 정책에 속아왔다, 이거 하나 밖에 없고, 이 나라가 엄청나게 예의가 바르고 인권을 존중하고.”

“내가 진짜 자유의 땅에 왔는가 믿어 안 졌어요.”

탈북 여성으로는 드물게 키가 컸던20대 중반의 데보라 씨 얼굴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했습니다.

“진짜 누가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별에서 다른 별로 온 느낌이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엄청 뒤떨어져 있으니까 이걸 따라가자면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죠. 그래서 좀 부담스런 점도 있고 과연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이 때까지 많은 고생을 당해봤으니까 이제는 인간의 어려움이 우린 어려움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면 되겠죠. 기회의 나라이니까. 하하”

3년 5개월이 지난 현재 이들 탈북자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우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포부를 밝힌 데보라 씨를 찾아가 봤습니다.

북부 뉴저지 주의 한 종합병원 통증외과. 보조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데보라 씨가 능숙하게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입시학원 총무 자리를 박차고 간호사의 꿈을 쫓아 두 달 전 미국 병원으로 직장을 옮긴 데보라 씨. 이 곳에서 보조 간호 일 뿐아니라 한인 환자들의 통역도 맡고 있습니다.

“페인 메디슨이라고 통증외과예요. 어떤 때는 한국 환자들이 오거든요. 그러면 제가 한국 환자분들 통역을 해주러 수술실에 들어가야 돼요. 수술실 가운 다 입고 모자 쓰고 수술도 함께 보거든요.”

데보라 씨는 자신의 직업에 매우 만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잖아요. 근데 그게 금방 돼서 너무 좋고 또 다 미국 회사라서 한국 사람도 없고. 미국 사람들 문화 금방 접할 수 있고 영어도 제가 하기 싫어도 하루 종일 써야 하니까. 교과서에서 배우는 영어랑 직접 미국 사람들이 하는 영어랑 다르단 말예요. 그런데 그 것을 매일매일 접할 수 있어 좋아요.”

데보라 씨는 얼마 전 미국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시험 GED를 통과해 지역 2년제 대학에서 공부하는 등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바닥부터 영어를 배운 지3년 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간호사 학부 들어가려면 GED 가 있어야 돼요. 통과 못할 줄 알았어요. 아무튼 열심히 했어요. 공부할 때는 밤을 패가며 했고 나중에 사흘 동안 시험을 쳤어요. 그 후에 인터넷에 접속해서 비밀번호 치고 눈을 감았어요. 제발 통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진짜 너무 고생해서 다시 그런 고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눈을 딱 떴는데 다섯 과목인데요. 모두 패스패스 된 거예요.”

미국에 정착한 탈북 난민들 가운데 GED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데보라 씨를 포함해 2~3명 안팎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탈북자들이 많지만 대부분 학업보다 돈을 벌 목적으로 생활전선에 먼저 뛰어들다 보니 공부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데보라 씨의 경우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0시를 넘어 들어오는 주경야독의 노력 끝에 얻은 성과이기에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열매를 맺기까지 겪었던 좌절과 아픔도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뷔페식당에서 일했는데 그날 12시간씩 서서 일해서 너무 힘들어서 오후쯤 식탁에 살짝 걸터 앉았는데 한인 사장님한테 딱 걸렸어요. 근데 욕을 하는데 여태까지 못 들어 본 욕을 40분 동안 쌍욕을 하는데 자기 딸도 아니고 젊은 사람이. 그래서 그 날로 울면서 앞치마 사장 면상에 던져버리고 나왔어요. 매 맞은 것 보다 더 했던 것 같아요. 마음에 상처 받은 게.”

미국에 처음 도착한 탈북자들은 언어 문제 때문에 대부분 첫 일을 한인업체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업주와 동료들, 그리고 가난한 나라 북한을 경시하는 일부 편견 때문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한 탈북자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는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게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 살면서 하고 싶은 말 못하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하면 아 잘못한 건가. 자기가 생각할 줄 모르고..아 이건 아닌데 그렇게 생각 못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게 교육 받았다면 지금 김정일이 잘못했다고 다 들고 일어났겠죠. 근데 북한에서 너는 잘못한 것이다 하고 강요식으로 자라서 그런지 주눅부터 들고.”

북한인권 전문가들은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공포정치 때문에 잘잘못에 관계 없이 죄책감부터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자존감 부족과 생활총화 등에 따른 비판적 습관 때문에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거나 분노하는 모습이 탈북자들에게서 자주 목격된다고 지적합니다.

데보라 씨 역시 그런 습성 때문에 미국문화에 적응하는 데 진통을 겪은 것입니다.

“여기 미국 생활환경은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다 말할 수 있고 옳고 싫고 나쁘고를 똑바로 가려서 밝힐 수 있잖아요. 저는 솔직히 싫다는 말 절대 못했어요. 뭐 하라면 오케이 하며 다 했는데 이제는 싫다는 말 할 수 있고 나는 못하겠다는 말 할 수 있고 그 걸 배운 것 같아요.”

미국 내 탈북자 100명 시대를 앞두고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이 현지취재를 통해 보내드리는 특집방송. 내일 2부에서 미국 내 탈북 난민 1호 데보라 씨의 정착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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