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미국 50개 주: 워싱턴주 2부

워싱턴주 노스캐스케이드 국립공원에 있는 블루 레이크.
워싱턴주 노스캐스케이드 국립공원에 있는 블루 레이크.

진행자: 미국의 혁신과 문화, 그리고 미국 50개 주까지, 다양한 미국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USA’입니다. 김철한 기자와 함께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워싱턴주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기자: 네, 오늘은 미국 북서쪽의 낭만 있는 워싱턴주가 어떻게 세계 최대의 '항공기 공장'과 글로벌 기술 기업들의 성지로 탈바꿈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진행자: 워싱턴주는 지도에서 보면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림만 있을 것 같은데, 지형적으로 엄청난 반전이 숨어 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워싱턴주 한가운데를 거대한 '캐스케이드산맥(Cascade Range)'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의 습한 공기가 이 높은 산맥에 부딪히면서, 서쪽 시애틀 일대에는 연중 비가 자주 내리는 우림 지역으로 형성돼 있습니다. 반면 산맥을 넘어간 동쪽 지역은 수분이 없는 건조 분지와 사막성 지형이 펼쳐집니다. 차로 2~3시간만 달리면 비 내리는 울창한 숲에서 바짝 마른 사막 지대로 풍경이 뒤바뀌는 극단적인 지리적 매력이 있습니다.

진행자: 대자연의 변화가 극적이네요. 그런데 이런 자연환경이 하늘을 나는 비행기 제국, 바로 보잉(Boeing)을 탄생시킨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면서요?

기자: 항공 역사의 재미있는 필연입니다. 1916년 윌리엄 보잉이 처음 비행기를 만들 당시, 비행기 동체는 쇠가 아니라 소나뭇과 상록수인 '가문비나무 목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워싱턴주의 울창한 침엽수림은 그야말로 원자재 창고였던 셈이죠. 여기에 풍부한 강물을 활용한 대규모 수력 발전 인프라 덕분에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원자재와 값싼 산업용 전기가 맞아떨어지면서 시애틀 에버렛(Everett)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비행기 조립 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진행자: 거대한 나무와 수력 발전이 비행기를 띄운 셈이네요. 그런데 보잉이 만든 제조업의 번영이 오늘날 첨단 기술 기업에 뜻밖의 기회를 주었다면서요?

기자: 그렇습니다. 거대한 비행기를 정밀하게 설계하고 조립하려면 복잡한 수학 연산과 정밀 기계공학에 능한 많은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보잉 덕분에 시애틀 일대에는 수십 년간 미국 최고 수준의 '숙련된 하드웨어 엔지니어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를 고향 시애틀 인근으로 옮겨오고, 제프 베이조스가 아마존을 창업할 수 있었던 밑천이 바로 보잉이 깔아놓은 탄탄한 엔지니어 자원 때문이었습니다.

진행자: 정밀 제조업의 인재들이 디지털 소프트웨어 인재로 바통을 터치했군요. 그래서 오늘날 이곳을 실리콘밸리에 빗대어 '실리콘 레인포레스트(Silicon Rainforest)', 즉 '테크 우림'이라고 부르는 거군요?

기자: 네, 오늘날 전 세계 인터넷 클라우드 인프라 시장의 절반 이상을 아마존의 AWS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애저(Azure) 두 회사가 장악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누르는 수많은 앱과 생성형 AI의 데이터 연산이 바로 워싱턴주 숲속에 자리 잡은 서버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셈입니다. 제조업의 허브였던 도시가 전 세계 데이터의 심장부로 변신한 것이죠.

진행자: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와 비교했을 때, 워싱턴주만의 독보적인 정책도 도움이 되었다고요?

기자: 바로 '개인 소득세가 없다’는 점입니다. 워싱턴주는 텍사스주와 같이 개인 소득세를 걷지 않는 미국 내 9개 주 중 하나입니다. 평균 10%를 넘나드는 캘리포니아주의 개인 소득세율에 부담을 느낀 실리콘밸리의 최고급 AI 개발자와 엔지니어들이 대거 워싱턴주로 이주해 오면서 인재 확보 전쟁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기술 자본이 너무 급격히 몰리다 보니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엔지니어들의 고액 연봉이 유입되면서 시애틀의 집값과 월세 비용이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오랜 소상공인과 원주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피해를 겪게 되었죠. 이에 시 당국은 연봉 15만 달러 이상을 주는 대기업들에 세금을 물려 공공 임대 주택 기금을 마련하는 '점프스타트(JumpStart) 급여세' 조례를 도입하는 등, 혁신과 공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치열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진행자: 마지막으로, 워싱턴주가 기술이나 항공 말고, 전 세계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숨은 농업 강자라는 사실도 있죠?

기자: 맞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대형마트에 숨겨진 비밀인데요. 워싱턴주는 미국 전체 사과 생산량의 60% 이상을 책임지는 1위이자, 최고급 노란색 체리인 '레이니어 체리(Rainier Cherry)'의 고향입니다. 캐스케이드산맥 동쪽의 뜨거운 햇살과 화산재 기반의 비옥한 토양, 그리고 풍부한 수자원이 결합해 전 세계에서 가장 당도가 높은 과일을 키워내는 천혜의 과수원 지대를 형성한 건데요. 재미있는 상업적 사실은 전 세계 수제 맥주 열풍을 떠받치는 맥주 원료, 즉 '홉(Hops)'의 70% 이상도 바로 이 워싱턴주 야키마 밸리(Yakima Valley)에서 재배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워싱턴주는 전 세계 '디지털 클라우드 시장'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식탁과 전 세계 수제 맥주 제조 공급망의 '원자재'까지 통제하는 숨은 거인인 셈입니다.

진행자: 네, 잘 들어봤습니다. 김철한 기자였습니다.

Forum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