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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Grover Cleveland
Grover Cleveland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미국 역사 이야기, ‘역사 속 아메리카 250’입니다. 조진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조 기자, 안녕하세요?

기자: 네, 안녕하세요.

진행자: 진행자: 오늘은 미국의 22대 대통령이자 24대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만나보겠습니다. 독특한 정치 이력뿐 아니라 원칙을 강조한 정치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조진우 기자, 먼저 어떤 인물이었는지 소개해 주시죠.

기자: 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1837년 뉴저지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목회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정규 교육을 충분히 받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뉴욕주 버펄로의 법률 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며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해 22세에 변호사가 됐는데요. 이후 버펄로에서 법률가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1881년 뉴욕주 버펄로 시장에 당선된 데 이어 1883년부터 1885년 초까지 뉴욕주 주지사까지 지냈습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정치권의 부패와 특혜를 비판하며 개혁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8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진행자: 당시 정치권의 부패를 비판했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런 원칙을 지키려고 했습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정부가 특정 집단에 특별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특히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이라도 부당하거나 정부의 역할을 지나치게 확대한다고 판단하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7년 텍사스주 가뭄 피해 농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안입니다. 의회는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에게 종자를 제공하기 위해 연방 예산을 배정하려 했지만, 클리블랜드는 이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연방정부가 이런 지원에 나서면 국민이 정부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재난 피해를 본 농민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결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정부가 어디까지 국민을 지원해야 하는지를 놓고 자신의 원칙을 강하게 밀어붙인 대통령이었습니다.

진행자: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 원칙이 언제나 국민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겠군요.

기자: 맞습니다. 클리블랜드는 남북전쟁 참전용사들의 연금과 관련해서도 엄격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군 복무와 관련이 없거나 정당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연금 지급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는데요. 이러한 결정은 일부 참전용사와 관련 단체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클리블랜드는 대통령이 의회의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 정부 지출과 법안의 타당성을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첫 임기 동안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면서 ‘거부권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도 얻었습니다.

진행자: 정치적으로 강경한 모습을 보였던 클리블랜드에게도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고요? 백악관에서 결혼한 대통령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자: 맞습니다. 클리블랜드는 1886년 백악관에서 프랜시스 폴섬(Frances Folsom)과 결혼했습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49세였고, 풀섬은 21세에 불과했습니다. 풀섬은 미국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이자, 영부인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이후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대통령으로서 엄격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를 보였지만,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일은 당시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진행자: 대통령의 결혼식이 백악관에서 열렸다는 사실이 흥미롭네요. 그런데 클리블랜드는 첫 임기를 마친 뒤 재선에 실패했죠.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기자: 1888년 대통령 선거에서 클리블랜드는 공화당 후보 벤저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에게 패배했습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클리블랜드가 전국 단위의 일반투표에서는 해리슨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별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제도에서는 선거인단 확보가 더 중요했고, 결국 클리블랜드는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이후 클리블랜드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4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89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해리슨을 꺾고 당선됐습니다. 이렇게 그는 22대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4년 후에 24대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돌아왔습니다.

진행자: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도 같은 경우입니다만, 한 번 패배한 대통령이 다시 당선돼 돌아온 것은 미국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인데요,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에서는 어떤 과제를 마주했습니까?

기자: 두 번째 임기는 첫 번째 임기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1893년 미국에서는 심각한 금융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이 늘어나는 등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는데요. 클리블랜드 행정부는 정부의 금 보유고를 유지하고 금융시장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은 매입을 늘리도록 한 ‘셔먼 은 매입법’의 폐지를 추진했습니다. 이 법이 화폐 공급과 금 보유고에 부담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은 생산 지역과 농민 등 일부 계층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경제위기 속에서 정부가 어떤 정책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갈등이 커진 겁니다.

진행자: 경제위기가 심각해지면서 노동자들의 불만도 커졌을 것 같은데요. 당시 어떤 파업이 있었고, 클리블랜드는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기자: 1894년 발생한 풀먼 파업이 대표적입니다. 철도 차량을 제조하는 풀먼사의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반발해 파업에 나섰습니다. 파업은 다른 철도 노동자들의 동참으로 확산했고, 철도 운송에도 큰 차질이 발생했습니다.

클리블랜드 행정부는 연방 우편물 운송과 철도 교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연방군을 투입하며 강경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군대의 개입은 노동자들과의 충돌을 불러왔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정부가 노동자들의 요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강경 대응에 나섰다는 비판도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클리블랜드의 대통령직을 평가할 때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정부의 법 집행과 질서 유지를 강조했지만, 노동자와 노동운동 지지자들에게는 기업에 유리한 대통령으로 비쳤습니다.

진행자: 처음에는 부패와 특혜에 맞선 개혁가로 주목받았지만, 두 번째 임기에는 경제위기와 노동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비판을 받았군요. 결국 대통령직을 마친 뒤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기자: 클리블랜드는 18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세 번째 임기에 도전하지 않았고,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1908년 6월 2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정부의 특혜와 지출을 경계한 원칙주의자였지만, 경제위기와 노동자 파업에 대한 대응을 놓고는 지금까지도 평가가 엇갈립니다.

진행자: 선거에서 패배한 뒤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온 대통령이자, 정부의 역할과 경제위기 대응을 놓고 논쟁을 남긴 인물, 22대이자 24대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이야기였습니다. 조진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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