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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율리시스 S. 그랜트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 디지털 채색 이미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 디지털 채색 이미지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 관련 소식을 전해 드리는 ‘역사 속 아메리카 250’입니다. 조진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자: 네. 그랜트는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승리로 이끈 뒤 국민적인 명성을 얻었고, 1868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군 생활을 그만둔 뒤에는 농사와 부동산 사업 등을 시도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에 복귀했고, 전쟁에서 거둔 연이은 승리로 미국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진행자: 전쟁 영웅에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인생이군요. 군인으로서 그랜트가 결정적인 명성을 얻은 전투는 무엇이었습니까?

기자: 1863년 미시시피강 유역의 빅스버그 전투가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북군은 빅스버그를 장악하면서 미시시피강의 통제권을 확보했고, 남부연합은 동서로 분리되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그랜트는 북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1865년 4월 9일에는 버지니아주 애포매톡스에서 남부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으로부터 북버지니아군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진행자: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다시 하나의 나라로 통합돼야 했습니다. 그랜트 대통령에게는 어떤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까?

기자: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 사회를 재건하고, 해방된 흑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랜트는 1869년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1870년에는 인종이나 피부색 등을 이유로 투표권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정헌법 제15조가 비준되는 과정에서 이를 지지했습니다. 또 남부에서 흑인 유권자를 겨냥한 폭력과 위협이 이어지자, 연방정부의 권한을 활용해 대응했습니다.

진행자: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기자: 1870년 법무부를 신설하는 법안에 서명했고, 연방정부가 시민권 관련 법률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Ku Klux Klan)의 폭력과 흑인 유권자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연방 차원의 법 집행을 강화했습니다. 1870년과 1871년에 제정된 집행법을 활용해 KKK 조직원들을 기소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남부의 폭력과 인종차별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했고, 이후 법원의 판결과 정치적 변화로 연방정부의 대응에도 한계가 생겼습니다.

진행자: 대통령 재임 중에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성과도 있죠?

기자: 네, 대표적인 사례가 옐로스톤 국립공원입니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2년 3월 1일 옐로스톤 국립공원 지정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이 탄생한 겁니다. 이곳은 자연 경관과 야생 생태계를 보전하고 대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정됐습니다. 그랜트 대통령 재임기에 만들어진 또 다른 중요한 제도가 법무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대통령직은 시민권 문제뿐 아니라 미국의 공공 제도와 자연 보전의 역사에서도 의미를 갖습니다.

진행자: 그랜트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요.

기자: 네, 그랜트 행정부는 여러 부패 사건과 정치적 인맥을 둘러싼 논란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1870년대에는 주류 판매업자들이 연방 주세를 빼돌린, 이른바 ‘위스키 링’ 사건이 드러났습니다. 그랜트 대통령의 측근도 수사 대상에 올랐고요. 또 그랜트 대통령이 측근을 신뢰하고 옹호하면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다만 행정부 안의 모든 부패 사건에 그랜트 대통령 본인이 직접 관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랜트 대통령 재임기는 시민권 보호를 위한 연방정부의 활동과 행정부의 부패 논란이 함께 존재했던 시기였습니다.

진행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의 삶도 독특했다고요?

기자: 네. 1877년 두 차례의 임기를 마친 그랜트는 아내 줄리아와 함께 약 2년 동안 세계 여행을 떠났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지역을 방문했고, 외국의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전쟁 영웅 출신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뉴욕에 정착했지만, 투자 사업에서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었습니다.

진행자: 말년에는 회고록을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기자: 그렇습니다. 그랜트는 말년에 인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 그는 남북전쟁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이 출판을 도왔고, 그랜트는 1885년 7월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원고를 마무리했습니다. 회고록은 사후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뒀고, 오늘날에도 남북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진행자: 전쟁터에서의 승리, 대통령으로서의 시민권 정책, 그리고 말년의 회고록까지.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의 삶은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 어떤 나라로 나아갈지를 고민하던 시기와 맞닿아 있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군사적 승리로 이름을 알렸지만, 대통령으로서는 전쟁 이후의 통합과 시민권 보호라는 복잡한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처럼 그랜트 대통령의 삶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이 서로 다른 과제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진행자: 남북전쟁의 북군 총사령관에서 미국의 18대 대통령으로,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록한 작가로 남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이야기, 조진우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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