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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아메리카 250] 제12대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제 12대 미국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
제 12대 미국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 소식 전해드리는 '역사 속 아메리카 250', 오늘은 김현숙 기자와 함께합니다.

기자: 미국 역대 대통령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제12대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을 소개해 드립니다. 지난번 전해 드린 제임스 포크 대통령이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미국 영토를 태평양까지 넓혔는데요. 그 전쟁에서 이름을 얻어 곧바로 백악관에 입성한 사람이 바로 후임자인 테일러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40년을 군인으로 살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한 번도 투표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진행자: 투표를 한 번도 안 해 봤다고요?

기자: 본인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직업 군인으로서 언젠가 자신의 최고사령관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반대표를 던지고 싶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1848년 자신이 후보로 나선 그 선거가 사실상 처음 관여한 선거였고, 정작 그 선거에서도 본인 표를 던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느 정당에 속해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진행자: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까?

기자: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테일러는 1784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켄터키에서 자랐고, 1808년 스물넷에 군에 들어가 40년을 복무했습니다. 1812년 미·영 전쟁과 미국 원주민 인디언과의 전쟁인 1832년 블랙호크 전쟁, 2차 세미놀 전쟁을 거쳤습니다. 이후 멕시코 전쟁을 통해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요. 특히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수적으로 크게 불리한 상황을 버텨내면서 전국적인 영웅이 됐습니다. 별명이 '올드 러프 앤드 레디(Old Rough and Ready)', 우리말로 하면 '거칠지만 준비된 노장' 정도인데요. 장군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낡은 옷차림으로 병사들과 함께 지낸 데서 붙은 별명입니다.

진행자: 후보 지명 과정에서도 일화가 있다고요?

기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848년 휘그당이 후보 지명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는데, 요금이 미납된 상태로 도착했습니다. 테일러는 10센트를 낼 수 없다며 수령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후보 지명 절차가 지연됐습니다.

진행자: 휘그당은 왜 이런 정치 신인을 택했습니까?

기자: 계산이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북부에는 나라를 지킨 군인으로 보였고, 남부에는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정치 경력이 없으니 노예제 같은 첨예한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휘그당은 아예 정강 정책조차 채택하지 않고 선거를 치렀습니다.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정치 경력 없이 군 경력만으로 대통령이 된 첫 사례였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막상 취임한 뒤에는 남부의 기대와 달랐다고요?

기자: 그게 테일러 대통령의 가장 큰 반전입니다. 테일러는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에 농장을 두고 100명이 넘는 노예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얻은 서부 영토에 노예제를 확대하는 데는 반대했습니다.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노예제 없는 자유주로 곧바로 편입시키자고 밀어붙였는데요. 남부 정치인들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일부가 연방 탈퇴를 거론하자, 테일러는 반란을 이끄는 자는 누구든 목을 매달겠다는 취지로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남부 출신 대통령이 남부와 정면으로 충돌한 겁니다.

진행자: 개인사에도 남부연합과 얽힌 대목이 있죠?

기자: 둘째 딸 세라 녹스 테일러의 이야기입니다. 열여덟 살에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졌는데, 테일러가 반대했습니다. 군인의 아내로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1835년 결혼했지만, 딸은 석 달 만에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위가 훗날 남부연합 대통령이 되는 제퍼슨 데이비스입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멕시코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며 화해했습니다. 테일러의 외아들 리처드는 훗날 남부연합군 장군이 됐습니다.

진행자: 백악관 생활은 어땠습니까?

기자: 군인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마차보다 말타기를 좋아했고, 전쟁터를 함께 누빈 애마 '올드 화이티(Old Whitey)'를 백악관 잔디밭에 풀어놓고 길렀습니다. 부인 마거릿 여사는 공식 행사에 거의 나서지 않아, 딸 메리 엘리자베스가 백악관 안주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테일러 대통령의 임기가 매우 짧았죠.

기자: 네, 취임 1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850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테일러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워싱턴기념탑의 주춧돌을 놓는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이 탑은 전임 제임스 포크 대통령 때인 1848년에 공사가 시작됐는데요. 그날은 몹시 덥고 습했지만, 테일러는 대통령답게 보이려고 두꺼운 외투에 넥타이와 모자까지 갖춰 입고 오랜 시간 야외 행사에 있었습니다. 백악관에 돌아와 몹시 허기지고 목이 말랐던 그는 생채소를 먹고 얼음을 넣은 우유와 체리를 많이 먹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부터 심한 복통과 구토가 시작됐고, 닷새 뒤인 1850년 7월 9일 예순다섯의 나이로 숨졌습니다.

진행자: 사인을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고요?

기자: 네, 당시 의사들은 급성 위장염으로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와 80년대에 독살설이 퍼졌습니다. 건강하던 대통령이 갑자기 숨졌고, 죽자마자 그가 그토록 반대하던 타협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991년 6월, 사망한 지 141년 만에 유해를 꺼내 검사했습니다.

진행자: 결과는 어땠습니까?

기자: 비소가 검출되긴 했지만 극미량이었고, 건강한 성인에게서도 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납과 수은 검사도 음성이었습니다. 켄터키주 수석 검시관은 테일러 대통령은 독살되지 않았다고 못 박았습니다. 다만 일부 역사학자는 검사 방식에 한계가 있었다며 여전히 의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진행자: 테일러 대통령의 죽음이 미국 역사를 바꿨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기자: 네, 밀러드 필모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는데, 테일러와 정반대로 남부와의 타협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1850년 타협입니다. 남북전쟁을 10여 년 늦췄다는 평가와 함께, 문제를 미뤘을 뿐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만약 테일러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미국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이 지금도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진행자: 유적지도 남아 있습니까?

기자: 켄터키주 루이빌에 ‘재커리 테일러 국립묘지’가 있습니다. 원래 가족 묘지였던 곳인데, 1991년 유해 발굴도 여기서 이뤄졌습니다. 부인 마거릿 여사도 함께 묻혀 있습니다.

진행자: 평생 투표 한 번 안 해 본 군인에서 미국 대통령이 된 12대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이야기, 김현숙 기자와 함께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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