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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6)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6)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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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여섯 번째 시간으로 1912년 박용만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여섯 번째 시간으로 1912년 박용만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한 박용만은 현지에서 이른바 ‘무형국가론’을 적극적으로 주창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하와이대학교의 최용호 전 교수는 그의 논문 ‘박용만’에서 무형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해외에서 한인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 정치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박용만의 절실한 신념에서 나왔다고 지적했습니다.

최 전 교수는 또 구체적으로 박용만이 구상한 ‘무형국가’는 미국처럼 주권재민 사상에 따라 삼권분립이 되어 있고 연방제를 따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박용만과 대한인국민회가 선포한 이 무형국가론은 미주 한인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무형정부’, 즉 ‘임시정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필요한 헌법을 구상한 것은 한국 역사상 처음이라고 평가합니다.

[녹취: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 “그것도 일반적으로는 보통 해외 쪽에서는 망명정부, 그러니까 자기 나라가 망할 때 그 정부 중에 일부가, 정부 인사 중에 일부가 다른 나라로 가서 망명정부라는 걸 세우는데 여기서는 망명정부가 아니라 국민들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세우자는 것이 굉장히 큰 의지죠? 그래서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시원이라고 볼 수 있는 사고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게 바로 박용만 선생의 무형국가론과 그리고 이를 지원을 했던 국민회의 사고 속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태어났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것이 나중에 1919년 임시정부까지도 결성되는 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거죠.”

박용만의 노력으로 재미 한인들 사이에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하자 박용만은 1911년 6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네브래스카주로 향했습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이유는 6월에 개학하는 한인소년병학교 업무를 관장하고, 이후 소년병학교 하기 군사훈련이 끝난 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박용만이 떠난 뒤 대한인국민회 안에서는 중앙총회 건립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한인국민회는 1911년 8월 중앙총회를 발족시켰는데요. 당시 사정을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아까도 해외 각지에 지회가 러시아, 만주 지역까지 생긴다고 했잖아요? 사실 중앙총회 설립은 1911년에 생겨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중앙총회의 임원들이나 이런 것을 제대로 못 구해요. 그리고 이때 바로 그것을 이 중앙총회 선포식의 주 작성자가 바로 박용만 선생이에요. 당시 박용만 선생은 이때 이미 무슨 생각을 하냐면 국민회를 중심으로 해외 각지에 지방회가 설립되니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너무 멀다. 그러면 한국하고 가까운 곳이 어디냐. 만주나 러시아 지역 아니에요? 그쪽의 독립운동가들하고 서신을 교환하면서 독립군 기지를 좀 알아봐 달라. 독립군을 어디에서 양성할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차피 그래도 중앙총회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빨리 체제를 갖춰야 하겠다 해서 중앙총회 선포식을 하는 거죠.”

중앙총회가 발족하자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 헌장의 초안을 가지고 1911년 9월 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이어 9월 하순 멕시코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한민보 주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박용만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임시정부’를 목적으로 설립한 것으로 봤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이때 비로소 아까 얘기했던 북미 지역, 하와이 지역, 만주 지역, 그다음에 러시아 지역, 멕시코 지방까지를 해외 한인을 총괄하는 단체로 하는데, 이때 보면 박용만 선생이 뭘 생각을 했냐면 사실상 박용만 선생은 이것을 모든 한인의 대표기관으로 만들려고 했던 게 무형국가론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제 중앙총회가 그 정부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선언을 해버려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하자. 그리고 자치제도를 실시하자. 이 얘기는 뭐냐 하면 중앙총회가 사실상 임시정부다. 최고 기관이다라는 거죠. 그다음에 자치제도를 실시하자는 건 뭐냐 하면 실상 땅은 없지만, 거기서 자치제도를 통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만드는 거죠.”

이런 가운데 1911년 11월 하순 대한인국민회 헌장 초안이 나왔고,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는 이듬해인 1912년 11월 8일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를 약 20여 일에 걸쳐 진행했습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그의 저서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에서 이 중앙총회 의회 소집이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대한인국민회가 사상 최초로 입법 회의를 개최한 것이라고 평가했는데요. 이 회의에 참석한 박용만은 중앙총회 외교위원으로 선임됐습니다.

중앙총회 대표원 의회는 15개 항에 달하는 사항을 의결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새로 의결된 사항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기존 회금을 의무금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는 대한인국민회가 ‘자치정부’로서 회원들이 아닌 ‘국민’들에게 세금을 걷으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도훈 교수는 또 이런 납세 의무 외에 대한인국민회가 병역 의무를 통해 군인들을 조직적으로 키우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그리고 또 하나 얘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각지에 있는 해외 한인들은 국민회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다. 당연히 국민이면 의무가 있잖아요? 요즘 말로 하면. 그런데 그때 당시에도 국가는 없지만, 무형국가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무형국가로 너희들이 인식을 하고 의무를 지라는 얘기에요. 그러면서 이때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이 우리가 국민의 의무 중에 납세의 의무하고 국방의 의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납세는 뭐에요? 정부에서 세금을 걷어야 운영을 하듯이 국민회에서 국민의무금이란 제도를 만들어요. 그러니까 국민의무금이라면 요즘 말로 세금을 내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병역의 의무가 있는데, 병역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1909년부터 사실 이미 국민회 자체에서 군인양성운동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각지에서 군인들을 키워요. 그러니까 그전에는 자발적으로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국민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적으로 키우는 의미가 있죠.”

대한인국민회는 이런 중앙총회 의회 결의 사항에 따라 1912년 11월 20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 선포식을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발표된 선포문은 박용만이 기초했는데요.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낭독: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선포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 제도를 실시할 것. 각지에 있는 해외 동포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일반 동포에게 의무 이행을 장려할 책임을 가질 것. 금후에는 대한인국민회에 입회금이나 회비가 없을 것이고, 해외동포는 어디에 있던지 그 지방 경제 형편에 의하여 지정되는 의무금을 대한인국민회로 보낼 것이다.(출처-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김도훈 저)

박용만이 작성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선포문은 미주 한인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그러니까 사실상 보면 이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선포한다는 의미는 땅은 없지만, 임시정부로서의 권한을 갖는.. 물론 임시정부로서의 발전이 형태상으로 되지는 않는데 그 구상 속에는 사실상의 정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자는 그런 의미가 바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에 담겨 있는 겁니다.”

김도훈 교수는 또 그의 저서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선포문은 근왕주의를 청산하고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표명한 최초의 선언으로, 개항 이래 추진되어 왔던 근대국가 수립 노력이 이때 와서 맺음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공화주의 선언은 후일 대동단결선언과 3.1 운동을 거쳐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대한민국’으로 태동하는 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여섯 번째 시간으로 1912년 박용만이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미주 한인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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