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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4) 네브래스카 활동과 한인단체 현황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4) 네브래스카 활동과 한인단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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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네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에서 활동할 시기 미주 한인 단체들의 현황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네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에서 활동할 시기 미주 한인 단체들의 현황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14년 한인소년병학교가 문을 닫은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측 항의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이 일본 통치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세워진 한인소년병학교를 헤이스팅스대학이 지원하는 것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러자 결국 헤이스팅스대학은 한인소년병학교에 대한 지원을 끊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한인소년병학교가 자치기관을 만들어 법에 의한 구속력을 가지고 둔전병식으로 군인을 훈련해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박용만의 구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 “그런데 이 한인소년병학교라는 게 의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최초라고 할 수 있죠? 해외에서는. 우리가 그전에는 역사에서 배울 때는 1906년에 이상설 등이 간도 쪽에 서전서숙이란 것을 만들었다고 그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데 그건 교육기관이고요. 이 경우는 물론 둔전병식 훈련제도라고 하는데 둔전병이라는 건 뭐냐면 우리가 나라가 없으니까 땅이 없잖아요? 둔전이라는 것은 묵은 땅이라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황무지를 개척해 가지고 우리가 경제적인 자립 기간을 만들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하고. 이러한 형태를 말하는 거죠. 그래서 한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라는 그런 의미가 있죠. 그런데 단지 좀 아쉬운 게 나중에 한인소년병학교가 박용만 선생이 하와이로 떠난 이후에 1914년경에 폐교되는 아쉬운 부분이 있죠. 그런데 이 학교 출신들이 나중에 보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또는 독립운동가로도 많이 활동해요. 그런 의미는 있습니다.”

1911년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용만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한인소년병학교와 네브래스카주 대한인거류민회 활동을 유보하고,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주필직을 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도훈 교수는 이를 위해 1909년과 1910년 당시 재미한인사회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처음에 미주에, 미주라는 건 독립운동사에서는 미국 본토, 북미라 그러죠? 그다음에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총칭해서 일컫는데 처음에 하와이에, 한국에서는 1902년이고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03년이니까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한 7천400여 명 정도가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자로 이민을 해버리죠. 그런데 1905년 1월쯤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사관을 폐지시키고 일본 영사의 지배를 받으라고 해요. 물론 그 이후에 을사조약이란 게 체결됨으로써 국권을 뺏겼다는 것은 나중에 알지만, 재미 한인들은 그걸 미리 알았던 거예요. 영사관 폐지를 통해서, 그리고 일본의 지배를 받으라니까. 그러니까 그때부터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1905년서부터 그러니까 독립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결성이 되죠. 그러다가 결정적인 게 아까 말씀드렸듯이 1907년 8월에 고종이 일제로부터 강제로 쫓겨난 다음에 의병 전쟁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번지니까 미국에서도 재미 한인들도 우리들도 뭔가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국권 회복을 내세우는 한인 단체들이 미주 곳곳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다 이들 단체가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됐는데요. 다시 김도훈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그때 북미 쪽에서 가장 중심이 된 단체가 안창호가 1905년에 조직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단체가 하나가 바로 공립협회고 이 공립협회가 나중에 국민회의 중심축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 국민회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적으로 러시아에 땅도 사면서 독립군 기지 개척 준비를 하고 이런 일을 하던 중에 1908년 3월에 바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란 인물이 와요. 친일파예요. 바로 이 사람을 공립협회하고 대동보국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중에 우리들이 잘 아는 두 분이 스티븐스를 총으로 처단하는데 그걸 장인환, 전명운 의거라 그러죠, 우리가... 그러니까 이때부터 갑자기 뭐냐면 그 재판을 후원하기 위해서 그건 암살이 아니라 정당한 독립투쟁의 방식이란 것을 재판을 통해서 하면서 내부적인 결속과 통합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이 돼요. 아까 얘기했듯이 박용만 선생이 애국동지대표회의를 통해서 그런 회의도 하니까 그 두 가지가 여파가 돼서 결국은 미 본토에서는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하고 하와이에는 이미 여러 단체가 1907년 9월에 통합해서 한인협성단체란 것을 만드는데 이 단체들이 1909년 2월에 통합해서 만든 단체가 국민회에요.”

이렇게 국민회는 사실상 재미한인사회의 통일기관이자 최고 기관으로 탄생했습니다.

한편 국민회는 창립 직후부터 해외 한인이 사는 모든 곳에 지방회를 조직해 이를 총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전쟁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한 뒤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방략인 이른바 ‘통일연합론’을 추진했는데요. 이와 관련해 김도훈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그리고 이제 국민회를 만들고 나면서 이 국민회를 중심으로 해서 해외 각지에 러시아를 독립군 기지로 개척하고자 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국민회를 만들고 나서 직접 누가 가냐 하면 국민회 총회장인 정재관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다가 미주로 와 있었어요. 이 둘을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 파견해서 국민회 지회를 건설하려고 파견해요. 그리고 나서 1909년 당시에 멕시코에 끌려간 노예 이민으로 한 1천여 명이 있었는데 5월쯤에 이들이 4년 계약에서 해방이 되니까 거기다가 멕시코 지방회를 설립해요. 이후 국민회에 대한 신문 보도가 전국에 퍼지니까 국민주의에 대해서 국민국가에 대해서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이니까 러시아와 만주 일대에 국민회 산하 지방회가 굉장히 많이 생겨요. 1909년 말에만 해도 러시아에는 13개 지방회가 생기고 회원이 한 1만여 명이 되죠.”

1910년대 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를 비롯해 만주, 러시아에 지방회를 건설하고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그러자 국민회 안에서는 향후 해외 각지의 한인 단체를 관장할 중앙총회 설립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김도훈 교수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그러니까 문제는 벌써 멕시코, 만주 지역, 러시아 지역에 해외 단체들이, 국민회 단체들이 많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들을 총괄해야 되잖아요? 총괄해야 하니까 그러면은 만주 쪽은 만주 지방총회, 러시아 쪽은 시베리아 지방총회, 이런 식으로 지방총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지방총회를 하나로 다스릴 기관이 필요하다고 해서 중앙총회라는 것을 설립하죠. 그리고 이와 함께 더불어서 아까 얘기했던 러시아와 만주, 중국 국경 지역에 보밀산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여기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비로소 해요. 이럼으로써 국민회가 사실상의 국권 회복을 하고 국민이 주인 되는 국가를 만들자는 의미에서 중앙총회를 확립하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이런 가운데 국민회는 1910년 5월 대동보국회마저 통합하고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했습니다.

김도훈 교수는 자신의 저서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에서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국가 인민을 대표하는 한인자치기관으로 설립한 뒤 입법∙사법∙행정 등 삼권 분립에 의한 자치제도를 실시하고 향후 여론을 수렴해 임시정부로 전환할 것을 계획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다음 해 총회장으로 문양목을 선출했습니다. 문양목은 박용만이 미국에 도착할 때부터 한인소년병학교 후원까지 도운 굳건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런데 총회장에 당선된 문양목이 박용만에게 대한인국민회 일을 함께하자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박용만은 이를 거절했는데요. 그러자 1911년 1월경 문양목이 직접 링컨으로 와 설득 끝에 승낙을 얻어 냈습니다.

단, 조건은 6개월 동안 대한인국민회 일을 정돈한 뒤 다시 학업을 계속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후 박용만은 ‘무형국가’를 조직하기 위해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한다고 선언하고 학교를 휴학한 뒤 이해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박용만 네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에서 활동할 시기 미주 한인 단체들의 현황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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