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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2) 애국동지대표회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2) 애국동지대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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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두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미국 중서부에 정착하고 애국동지대표회를 주최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두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미국 중서부에 정착하고 애국동지대표회를 주최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박용만은 이승만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약 석 달 후인 190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도미한 지 반년쯤 지난 1905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북감리교 연회에서 안정수와 함께 한인 전도사로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박용만은 9월 27일 숙부 박희병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셋이 함께 미국 네브래스카주로 떠났습니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로 떠난 것은 숙부 박희병이 국내에서부터 알고 있던 네브래스카주 선교사들 소개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퍼시픽 철도 회사의 추천서를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박희병으로부터 네브래스카 웨슬리안대학 예비과에 입학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박용만은 한인들을 위해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의 철도회사에 일자리를 얻어냈습니다. 이어 박용만은 이종희, 이희경, 김용대를 링컨시 학교에 입학시키고 김병희, 권종호, 정영기, 조진창 등 장년층을 링컨시 동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인 테이블록의 철도 공사장에 취직시켰습니다.

미주 한인사 전문가인 안형주 씨는 여기에는 아마도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녹취: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 “중부 개신교 미국인들은 제 발로 네브래스카에 들어온 한인들을 환영하였고, 이들을 전도하여 토박이 전도사를 만들어 그들이 귀국하여 가족과 친척들을 전도한다면 자기들이 한국에 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일자리를 얻어주고 도와주었습니다.”

박용만과 박희병은 커니시에 정착한 뒤 지역사회 지도자들에게 한인 학생들을 각자 집에 두어보라고 권고했고, 그 결과 함께 온 어린 학생들이 숙식할 곳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박용만과 박희병의 주선으로 학교에 다닌 대표적인 인물은 정한경, 정양필, 이관수, 유일한 등이었습니다.

이렇게 네브래스카주에 많은 한인이 몰렸던 것은 박용만의 공이 컸습니다. 미국으로 유학하러 온 한인들은 미국 서부 관문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대동공보 사장인 문양목으로부터 네브래스카주 링컨으로 가서 박용만의 조언을 받으라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 일자리를 얻으러 네브래스카주로 몰려들었습니다.

미주 한인사 전문가인 안형주 씨는 이렇게 네브래스카주에 모여든 한인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초기 한인들은 네브래스카 오마하의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와 서던 퍼시픽 철도 회사 본부에 가서 철도역 소제하는 일, 소나 돼지를 운반하는 화물차를 강변에서 세척하는 일, 옥수수 농장의 소작인으로 일하던가 아니면 농토를 차용하여 익숙한 콩 농사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 한인들은 미국 대평원에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박용만은 1906년 2월 멕시코 내 한인 참상을 조사하고 돌아온 숙부와 함께 그해 여름 다시 콜로라도주 덴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덴버에 자리 잡은 박용만과 박희병은 네브래스카주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나은 일자리를 찾아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오는 한인들을 위해 노동주선소와 여관을 운영하면서 많은 한인 청년을 취직시키고 그들을 규합했습니다.

박용만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대중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8년 애국동지대표회를 소집한 일입니다.

앞서 1907년 여름 일제가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데 이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군마저 강제 해산시키자, 이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의병 전쟁을 전개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립협회는 대대적인 독립전쟁론을 전개했고, 재미 한인 단체들도 1907년 8월부터 국권 회복을 위해 한인 단체가 통합해야 한다는 논의를 계속 제기했습니다.

이처럼 한인 단체 통합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을 때, 박용만이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전명운과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사건이었습니다.

1908년 정월 초하루, 박용만은 덴버에서 지역 한인 인사들과 임시회를 열고 1908년 6월 10일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할 것을 의결한 뒤 취지서를 작성해 북미와 하와이, 그리고 러시아 한인 단체에 대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역사학자인 한국교원대학의 김도훈 교수는 박용만이 1908년 6월에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려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한국교원대 김도훈 교수] “애국동지대표회라는 게 1908년에 박용만이라는 인물이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소집을 하는데 소집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하와이, 러시아 한인 단체들을 초청을 해요. 대표들을. 그런데 아무래도 러시아는 지역이 멀잖아요? 그러니까 위임을 하죠. 그런데 왜 6월에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자회의를 하자고 했냐면 그때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선출 대회가 덴버에서 열리게 됐어요. 그러니까 그때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미국 쪽의 여론에 주목을 받고자 하는 노림수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박용만은 핵심 연사인 이승만이 하버드대학 학위 일정 때문에 참석을 미루자 이승만의 참석을 위해 애국동지대표회의 일정을 변경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1908년 7월 11일 덴버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회의를 열 수 있었습니다.

애국동지대표회는 덴버 현지 지역신문들이 매일 주요 사항을 보도할 정도로 관심을 끌었습니다. 미주 한인사 전문가 안형주 씨가 저술한 저서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에 따르면 덴버타임스는 개회 첫날 ‘한인 애국자들이 덴버에 모여 전쟁을 준비하다’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낭독: 덴버타임스] 애국동지대표회는 한인들의 첫 국제적 회의로 한인들의 세계적 조직을 만들어 날로 노골화하는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이 대회의 단기 목적은 흩어져 있는 여러 한인 애국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미 크게 퍼진 구국운동의 추진을 조율하는 것이다. 여러 단체들은 젊은 한인들로 구성돼 있다. 애국동지들은 “해외 한인애국단체들을 조직한 지 오래이며 그들은 해외 각국의 조직을 총괄할 중앙조직을 만들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한인애국단체들은 군사 기술을 가지고 훈련하고 있으며, 압제자의 속박으로부터 조국을 해방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출처: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안형주 지음)

박용만이 주도한 애국동지대표회에서는 향후 국내외 통일 기관을 조직할 것, 이에 대한 준비로 각지에 통신국을 설치해 상호 간에 연락할 것을 의결했습니다.

하지만, 국민교육에 필요한 내외서적의 저술이나 번역 등에 관한 문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후일 토의과제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둔전병제에 바탕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한국 교원대학 김도훈 교수는 한인군사학교 설립이 독립전쟁을 전개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그의 의지가 첫발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7월 이전에 회의 준비를 하면서 박용만이 나중에 이승만 오른팔 역할을 하는 정한경 등등과 해 가지고 그 회의에서 무엇을 할 거냐 해가지고 여러 가지 논의 사항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힘을 썼던 게 우리 한인군사학교를 만들자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때 회의에 부치는데 그래 가지고 그 회의에서 대표적인 것이 뭐를 얘기를 하냐면 우리가 지금 1908년 당시는 이미 고종이 한국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의병들이 일어나서 독립전쟁이란 거를 의병전쟁이란 거를 일으키던 상황이거든요? 사실상 망국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데 뿔뿔이 흩어진 단체들을 통합을 해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군사학교를 만들자. 그리고 군사학교를 만들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한 다음에 국권을 되찾자는 그런 의미죠.”

박용만은 애국동지대표회를 마친 뒤 자신이 운영하던 노동주선소 겸 여관을 윤병구에게 맡기고 1908년 가을 학기에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링컨으로 떠났습니다.

김도훈 교수에 따르면 네브래스카대학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 연방정부가 땅을 제공하여 설립한 중부 7주의 주립대학 가운데 하나로, 유사시 장교로 활동할 수 있는 간부후보생을 양성하는 조건으로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박용만 두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이 미국 중서부에 정착하고 애국동지대표회를 주최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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