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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1) 미국에 오기까지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박용만 (1) 미국에 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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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 첫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의 출생과 그가 미국으로 건너오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 첫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의 출생과 그가 미국으로 건너오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박용만의 출생연도에는 약간 혼동이 있습니다.

미국 네브래스카주립대학 기록에 따르면 박용만은 1881년 7월 2일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92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박용만의 신원을 자세하게 조사한 보고서에는 1882년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궁전리에서 상민으로 출생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출생 신고를 늦게 했던 관습을 감안하면 1881년 출생이 더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박용만은 어릴 때 고아가 돼 숙부 박희병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해 글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한편 숙부를 따라 서울에 올라간 박용만은 관립 일본어학교에 다녔고 이를 계기로 일본에 유학생으로 가게 됐습니다. 거기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기주쿠, 게이오기숙학교에서 2년 동안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박용만은 귀국한 뒤 그의 친구인 안국선, 오인영과 함께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빈당과 보안회를 통해 당시 집정자의 부패,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 일본 세력의 침범 등을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활동 탓에 박용만은 1904년 여름 한성감옥에 투옥됐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옥중 동지인 이승만, 정순만과 함께 이른바 ‘삼만’이라는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1905년 초 박용만은 미국으로 갔습니다.

박용만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역사학자 김도훈 씨는 저서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에서 ‘사이토 문서’ 내용을 듭니다. ‘사이토 문서’는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의 자료를 모은 것으로 ‘조선독립운동의 근원’ 상동청년회 편에서 박용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낭독: 사이토 문서] 1904년 러일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때에 예수교 전도의 이름 아래 상동청년회라는 것이 출현하였다. 청년회의 간부는 이동녕, 이승만, 정순만, 이희간, 박용만, 조성환 외에 예수교 목사 전덕기를 회장으로 하고 회의 사업은 청년학원을 경영하여 뜻있는 청년을 양성하는 외에, 미국에 이민의 명분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이민개발회사와 묵계를 맺어 이희간을 러일전쟁 중에 고등군사탐정으로 종군하여 얻은 6만 8천 원 중 1만 3천 원을 유학생의 미국상륙 휴대금으로 유용하고, 박용만과 이희건을 미국에 파견하여 그 수지를 맞추었고, 이어 이승만도 유학생 감독으로 도미하고 이희간도 또한 상황시찰을 위해 일시 도미하였다. (출처: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김도훈 지음)

상동청년회가 유학생 파견을 목적으로 이희간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이승만, 박용만 등을 미국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동청년회에서 청년지사들의 미국 유학을 지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 의도를 간파한 상동청년회에서 계몽운동으로는 국권회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지사들을 해외로 망명시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박용만이 미국행을 결정한 것은 숙부 박희병과 상동청년회의 영향, 또 의형제인 정순만, 이승만의 영향 등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약 석 달 후인 1905년 2월 박용만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그가 휴대한 가방에는 이승만이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 원고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옥중에서 밀반출된 이승만의 옥중원고를 일본인 세관원의 적발을 피하고자 자신의 큰 가방 밑바닥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 원고는 1909년 그를 비롯해 신흥우, 문양목, 김밀리사 등 여러 독지가의 도움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1천 부가 발간돼 세상에 빛을 봤습니다.

박용만은 미국으로 건너올 때 옥중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이승만과 정순만의 어린 아들인 이태산과 정양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도미한 지 반년쯤 지난 1905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북감리교 연회에서 안정수와 함께 한인전도사로 임명됐고, 곧이어 9월 27일 숙부 박희병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셋이 함께 미국 네브래스카주로 떠났습니다. 당시 박희병은 상동청년회 후원으로 멕시코 한인 이민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던 것입니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주로 떠난 것은 숙부 박희병이 국내에서부터 알고 있던 네브래스카주 선교사들의 소개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퍼시픽 철도 회사의 추천서를 받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희병으로부터 네브래스카 웨슬리언대학 예비과에 입학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이유도 있습니다.

그와 숙부는 먼저 네브래스카 커니시에 정착해 그곳 한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철도회사와 교섭해 일자리를 알아내는 한편, 커니시 유지들에게 한인 학생들을 ‘스쿨보이’로 채용해 줄 것을 권유해 어린 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면서 조국이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용만은 1906년 2월 멕시코 내 한인 참상을 조사하고 돌아온 숙부와 함께 그해 여름 다시 콜로라도주 덴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덴버는 신흥도시로 탄광과 철도회사에서 노동자를 계속 모집했고 사탕무농장이 호황을 맞이해 많은 인력을 취직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덴버는 교육 면에서도 중고등학교 등록금이 면제됐고 주립대학 역시 다른 주보다 극히 적은 등록금만 받는 관계로 한인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덴버에 자리 잡은 박용만과 박희병은 네브래스카주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나은 일자리를 찾아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오는 한인들을 위해 노동주선소와 여관을 운영하면서 약 300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취직시키고 한인 청년들을 규합했습니다.

미주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는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개척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녹취: 미주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 한인들이 미국 대평원으로 가게 된 것은 미국 대륙 횡단 철도가 19세기 말에 완성되면서 동부 백인들은 날씨가 좋은 기회의 땅인 서부로 이주해 왔지만, 20세기 초 한인들은 반대로 동양인이 많은 서부에서 동양인이 없는 동쪽으로 일자리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 중부 대평원의 백인들이 원하지 않은 변두리 땅과 일자리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고용인이 되는 것보다 힘들더라도 자립하여 실업 자강을 추구하는 초기 이민자들의 개척정신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네브래스카주에 많이 한인이 살았던 것은 박용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하러 온 한인들은 미국 서부 관문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대동공보 사장인 문양목으로부터 네브래스카주 링컨으로 가서 박용만의 조언을 받으라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일자리를 얻으러 네브래스카주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1907년 6월 10일 숙부 박희병이 덴버에서 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자 박용만은 콜로라도예비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여관과 노동주선소를 홀로 운영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1907년 여름 일제가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데 이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군마저 강제 해산시키자, 이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의병 전쟁을 전개했습니다.

이에 따라 공립협회는 대대적인 독립전쟁론을 전개했고, 재미 한인 단체들도 1907년 8월부터 국권 회복을 위해 한인 단체가 통합해야 한다는 논의를 계속 제기했습니다.

이처럼 한인 단체 통합의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을 때, 미주 한인 단체의 통합을 촉진한 것은 박용만이 제의한 애국동지대표회였고,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전명운과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사건이었습니다.

1908년 정월 초하루, 박용만은 덴버에서 지역 한인 인사들과 임시회를 열고 1908년 6월 10일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할 것을 의결한 뒤 취지서를 작성해 북미와 하와이, 그리고 러시아 한인 단체에 대표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박용만 첫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의 출생과 그가 미국으로 건너오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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