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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어머니 날 제정에 앞장선 애나 자비스


[인물 아메리카] 어머니 날 제정에 앞장선 애나 자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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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 나라에서 지켜지는 현대적 의미의 어머니 날은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국가적인 휴일로 정하는데 가장 앞장 선 여성은 애나 자비스였습니다.

매년 5월 8일은 미국의 어머니의 날입니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고마움을 되새기는 어머니 날은 미국 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 100여개국에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미국처럼 5월 두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기념하는 나라는 캐나다, 스위스, 덴마크, 이탈리아, 핀랜드, 호주, 터키, 벨기에, 브라질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지역에 따라 5월 세째 주, 또는 5월 21일을 어머니날로 기념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 한국처럼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정하고 어머니 뿐만 아니라 부모와 조부모까지도 함께 공경하는 행사를 갖는 나라도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에서 지켜지는 현대적 의미의 어머니 날은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국가적인 휴일로 정하는데 가장 앞장 선 여성은 애나 자비스였습니다.

애나 자비스는 1864년 웨스트 버지니아 주 웹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애나 마리 자비스였습니다. 애나는 사업가인 아버지 그랜빌 자비스와 평생 주일 학교 교사로 일한 어머니 앤 리브스 자비스의 11명이나 되는 자녀들 중 9째였습니다.

이들 가족은 애나가 한살때 그래프턴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앤은 1881년 버지니아 주의 조그마한 도시 스톤튼에 있는 어거스타 여성 아카데미에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오늘날 매리 볼드윈 칼레지의 전신입니다.

애나 자비스는 1883년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그래프턴으로 돌아와 7년 동안 교사로 일했습니다.

애나의 어머니는 늘 언젠가는 누군가가 생존해 계시거나 돌아가신 모든 어머니를 위한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애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자주 그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앤 자비스는 앤드루스 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비롯한 각종 교회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앤 자비스는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성경속의 어머니들”이라는 과목을 마치고, 이 땅의 어머니들이 모든 인간의 삶에 베푸는,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노력을 기념하는 날을 만들어 주실 것을 기도드린다”는 간절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당시 12살이던 애나 자비스는 어머니의 이날 기도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1852년 애나의 어머니이자 사회운동가인 앤 리브스 자비스는 웹스터와 그 인근 여러 지역에서 어머니의 날 워크 클럽, Mothers’ Day Work Clubs을 조직해 열악한 보건과 위생 상태 개선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열악한 환경은 높은 어린이 사망율의 큰 요인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후에 애나 자비스가 어머니 날을 탄생시킨 기초가 됐습니다.

이들 클럽은 가난한 여성, 가정부 여성들에게 의약품을 제공하고, 몸이 아픈 산모 가정의 우유병과 음식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는 등 다양한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이런 운동에는 그 지역의 의사들도 힘을 보탰습니다.

남북 전쟁이 벌어지자 철도가 지나가는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됐습니다. 북군과 남군 지휘관들은 각각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래프턴의 철도를 사수하라고 휘하 부대에 명령했습니다.

앤은 곧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클럽 활동이 위협을 받게 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긴급히 관련자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이거나 끝난 후에도 멤버들간의 우의와 친선은 계속 이어간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교회와 단체를 분열시키려는 시도는 방지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Mothers’ Day Work Clubs은 북군과 남군 병사 모두에게 구호품을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갈라진 마을 주민들간의 평화를 도모했습니다. 앤 자비스는 네명의 자녀를 병으로 잃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전쟁 기간 내내 그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같은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싸움이 끝나갈 무렵 자비스 가족은 좀더 큰 도시인 그래프턴으로 옮겼습니다.

전쟁이 막을 내리고 북군과 남군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고조됐습니다. 1865년 여름 앤 자비스는 남군출신, 북군 출신, 정치적 파벌 어느 편을 막론하고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어머니 우정의 날, Mothers’ Friendship Day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폭력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 행사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정의 날행사는 그후 여러 해 동안 연례행사로 이어졌습니다.

1902년 남편 그랜빌 자비스가 사망한 후 앤 리브스 자비스는 딸 애나와 릴리아를 데리고 아들 클로드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앤 리브스 자비스는 1905년 그곳에서 72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녀의 시신이 안장되는 날 그래프톤에 있는 앤드류스 감리교회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72번의 종이 울렸습니다.

어렸을 때 들은 어머니의 감명 깊은 기도를 잊지 못한 애나 자비스는 어머니 사망 1주기른 맞아 묘지에서 추모식을 올리고 남북전쟁 전 조직됐던 어머니 봉사회, Mothers’ Day Work Clubs를 되살리기로 했습니다.

애나 자비스는 이때부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어머니의 날을 전국적인 기념일로 정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애나는 국회의원, 정부 관리, 사업가 등 각계 각층에 수 백통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언변이 뛰어난 애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임에 나가 어머니 날 제정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녀의 노력은 백화점 재벌이며 자선사업가인 필리델피아의 존 와나메이커의 지원으로 전환점을 맞게 됐습니다. 1908년 5월 10일, 첫 어머니 날 행사가 그래프턴의 앤드루스 감리교회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와나메이커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애나 자비스는 어머니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의미로 빨간 색과 흰색 카네이션을 다는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카네이션을 택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 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빨간 카네이션은 살아 계신 어머니, 햐얀 꽃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의미했습니다.

어머니 날 행사는 자비스가 예상했던 것 보다 빠르게 번져 나갔습니다. 1909년 45개 주, 미국령인 푸에르토 리코, 하와이 뿐만 아니라,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1914년에는 위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매년 5월 두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고 이날을 국정 공휴일로 지정하는 선포문에 서명했습니다.

애나 자비스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습니다. 1920년대 애나 자비스는 어머니 날이 지나치게 상업화 되는 현상을 몹시 못마땅해 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공경을 표하는 날로 시작했던 날이 꽃집, 카드 회사 등을 중심으로 이윤추구의 날이 돼 버렸다는 것이 자비스를 속상하게 했습니다.

애나 자비스는 본래의 어머니 날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비스는 국제 어머니날 협회를 조직하고 이 날을 기리는데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를 할수 있기 원했습니다. 또한 어머니 날 거부 운동을 조직하고 법정 투쟁도 추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아메리카 전쟁 어머니회는 어머니 날을 기금 모금 운동에 이용했습니다. 이런 행태에 반대한 애나 자비스는 1925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모금대회에서 그 단체와 충돌했습니다. 자비스는 난동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날을 개혁하려는 자비스의 열성적인 운동은 1940년대 초까지 계속됐습니다. 애나와 그의 동생 엘시노어는 변질돼 버린 어머니 날을 바로 잡는다는 운동에 물려받은 유산까지 다 쏟아부었습니다. 두 사람은 끝내 빈곤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애나 자비스는 1948년 11월 24일, 84세로 펜실배니아에 있는 웨스트 체스터의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웨스트 로렐 힐에 있는 어머니 묘지 옆에 나란히

묻혔습니다. 애나 자비스가 안장되던 날 웨스트 버지니아의 그래프턴에 있는 앤드류스 감리교회에서는 그녀의 나이에 맞추어 84번의 종이 울려 퍼졌습니다.

1972년에는 앤 마리아 리브스 자비스와 애나 마리아 자비스의 어머니 날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비영리 기관인 국제어머니날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애나 자비스 하우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녀의 생가는 1979년 미국 역사 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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