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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3) 스티븐스 저격 결정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3) 스티븐스 저격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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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전명운 세 번째 시간으로 스티븐스 저격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전명운 세 번째 시간으로 스티븐스의 도미 후 전명운이 스티븐스 저격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전명운은 한인들에게 알래스카 어업을 주선하여 한인 사회에 공헌하려고 했습니다.

모든 일이 충분히 되면 알래스카로 떠나려고 할 때, 더럼 스티븐스가 도미하여 친일 발언을 일삼게 되자 그를 처단하러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 (한국 위키피디아)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 (한국 위키피디아)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면서 을사늑약을 했고 정미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특히 1907년 정미조약으로 이른바 차관 정치를 하게 되고 고문 정치를 하게 되는데 대한제국의 모든 부서에 외국인 고문을 두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를 담당할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추천했는데, 스티븐스는 일본의 정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지만,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해 활동했습니다.

일본은 스티븐스가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대외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고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그에게 기밀 내훈 3조건을 엄수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낭독:기밀 내훈 3조건] 한일 외교를 수행할 때 외교상 중요한 안건은 대한제국공사와 협의한 후 그의 동의를 얻어서 조치할 것. 제국정부의 대한 방침은 수시로 제국공사에게 내시할 터인즉 귀하는 이에 배치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 한국 외교상 중요한 관계사항은 신속하고도 숨김없이 제국공사에게 통보해야 하며 또한 제국정부에 대하여 어떤 보고나 의견을 제출할 경우에는 제국공사를 경유하거나 직접 외무성에 제출할 것.

이 3조건은 스티븐스가 일본 정부나 재한일본공사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스티븐스는 훗날 한국의 국권을 제약한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섬으로써 한국인들의 큰 원성을 사게 됐습니다.

당시 재미 한인들은 공립신보를 통해 한국에서의 스티븐스의 언동을 알고 있었습니다. 1906년 1월 8일 공립신보에 실린 한 기사에서는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미국 정부에 을사늑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실었습니다.

[낭독: 공립신보 기사] 일본이 한국 정부를 병력으로 위협하여 얻은 약조가 아니라 그 약조에 대하여 대한제국 관료 몇 사람은 반대하였으나 그 외에 관료들이 낙종하여 도장을 찍었으니 실상은 일본이 위협함이 아니요. 그리고 한국 황실에 일병이 들어간 것이 없고 다만 이토 히로부미를 보호한 일본 순검 5, 6명뿐이었다.

하지만, 미주 한인들은 을사늑약에 대한 스티븐스의 태도에 강한 불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8년 일본 정부가 스티븐스를 미국에 파견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갑산동광을 둘러싼 미일 간 이권 교섭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만주 지역을 둘러싼 문호개방정책과 이민 문제를 두고 악화한 미국 내의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08년 3월 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이러한 스티븐스의 일정은 1908년 3월 14일에 보낸 전보를 근거로 하여 공립신보는 ‘일탐도미’라는 제목으로 게재했습니다.

이처럼 미주 한인들은 스티븐스를 일본 밀정으로 표현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인 공동체 안에 항일의식이 팽배해진 샌프란시스코에 스티븐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날인 1908년 3월 20일 신문기자들 앞에서 ‘일본의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 성명서 내용은 다음 날인 21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 등에 다음과 같이 게재됐습니다.

[낭독: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한국이 일본이 보호국이 된 이후 일본은 한국에 유익한 바가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 국민 간에 교제가 점점 친밀해지고 있다. 미국 국민이 필리핀 국민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 국민은 한국 국민을 위하여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 국민은 농민계층과 통감부에 참여하지 못한 양반 관료 계층으로 분열되어 있다. 농민층은 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 만큼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반 지배 계층은 여전히 부패되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의 농민 대중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하고 있지만, 양반 계층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이어 ‘LA타임스’ 1908년 3월 22일 자에도 스티븐스의 발언이 실렸습니다.

[낭독: LA 타임즈] 그 정부란 교활한 대신들이 왕을 둘러싸고 국민의 재산을 빼앗아 치부하고 국민은 자기 것을 가지고도 대신이나 관리들의 눈을 피해서 먹고살기에 온갖 신경을 쓰고 있다. 기간산업이란 모두 일본이 개척한 것이다. 그 국민은 진취성이 없고 미개한 족속인 것이다. 나는 다음 23일 오전에 이곳을 출발하여 워싱턴은 물론 전국 각지를 가능한 대로 방문하면서 이 실정을 알리는 강연을 가질 작정이다.

이와 같은 연이은 스티븐스의 발언 보도는 재미 한인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이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두 단체는 1908년 3월 21일 오후 8시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2350번지 공립관에서 공동회를 개최했습니다. 공립관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스티븐스의 발언에 분노하고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한 말들이 오갔습니다. 공동회에서는 미국 독립운동 당시 패트릭 헨리의 말이었던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를 표어로 삼고 스티븐스를 찾아가 항의하기 위해 총대를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총대로 공립협회원 최정익, 정재관, 그리고 대동보국회원 문양목, 이학현 등 4명이 선출됐습니다.

1908년 3월 22일 오전 총대 4명은 페어몬트호텔에서 스티븐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총대들은 스티븐스에게 일본의 한국 보호정치 이후 정세를 질문하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에 게재된 친일성명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이런 요구를 일축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을 찾아온 총대들에게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낭독: 스티븐스]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고 동양에 다행이라. 내가 형편을 보니 광무황제께서 실덕이 태심하고 완고당이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는 즉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러시아에 빼앗겼을 것이다. 일본 정책을 도와 말하며 신문에 내인 것은 사실이니 다시 정오할 것이 없다.

그가 이와 같이 계속해서 친일적 발언을 하자 페어몬트호텔에 갔던 사람들은 격분한 나머지 손에 잡히는 대로 그를 때렸습니다.

공립회관에 모인 총대들과 한인들은 3월 22일 제2차 한인공동회를 개최했습니다.

우선 총대들이 스티븐스와의 면담 내용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발표한 성명서에 대해 반성이나 취소할 의사가 없으며 한국인은 우매하고 독립할 자격이 없고 일본이 보호국화 하지 않았으면 러시아가 강탈했을 것이라고 발언을 서슴지 않아 총대들이 응징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공립회관에 모인 한인들을 여기저기서 “도저히 스티븐스를 보낼 수 없으니 내가 죽이겠다”라고 나섰습니다.

그를 처단하겠다는 말은 전명운이 제일 먼저 했습니다. 이어 허승원, 신영구, 이용규 등이 스티븐스 처단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다음으로 조용히 벽에 기대어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장인환이 결심을 한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면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한 총을 한 자루 사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양목은 연설을 통해 스티븐스 저격을 실행하려면 침묵 중에 암행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문양목의 연설이 끝나자 공립회관에 모여 있던 한인들은 스티븐스를 개인적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해산했습니다. 그러자 제2차 공동회를 해산한 뒤 바로 두 단체가 공동으로 비밀회의를 통해 처단 계획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획 수립에는 전명운과 장인환을 비롯한 총대들이 그 주역들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전명운은 신문에서 난 스티븐스의 사진을 준비하였으며 그를 저격하기 위해 권총을 챙겼습니다.

1908년 3월 22일 처소로 돌아온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국적으로 처단할 계획을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떠나는 스티븐스의 사진, 이동경로와 차편 등을 확인하며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전명운 세 번째 시간으로 스티븐스의 도미와 미주 한인들이 스티븐스 저격을 결정하기까지 과정을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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