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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2) 스티븐스에 관해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2) 스티븐스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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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전명운 두 번째 시간으로 도미 후 생활, 그리고 저격을 시도한 스티븐스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전명운 두 번째 시간으로 전명운의 도미 후 생활과 전명운이 저격을 시도한 스티븐스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청소년기부터 전명운은 매우 풍운아적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형밑에서 가업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지만 전명운에게는 내심 신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발달된 문명세계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어 한국을 근대화시켜야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업에 종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업에 얽매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즈음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와이 이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떠나 새 삶을 찾으려고 ‘이민’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 도착자 명단에 의하면 전명운은 당시 나이 20세, 기혼, 서울 거주, 배 이름 도릭호, 1903년 9월 21일 도착으로 돼 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전명운 의사가 원래 유학을 목적으로 태평양을 건넜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대부분의 미국 이민은 하와이 이민부터 시작이 됐는데 하와이로 이민을 오는 분하고 북미로 가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와이는 노동이민으로 가는 거고 북미로 가는 분들은 대개 유학이나 혹은 상업을 위해서 가는데 전명운 의사도 하와이 이민을 갔습니다. 근데 하와이 이민은 잘 알다시피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이민으로 가는 것인데 전명운 의사는 노동자로서 가서 거기서 인제 돈을 벌어서 인제 뭐 성공하겠다는 그런 생각보다는 유학을 목적으로 갔습니다. 직접 미국에 가기가 힘드니까 그 당시까지만 해도 전명운 의사는 하와이 이민을 일단 갔다가 거기서 인제 북미로 가서 근대적인 학문을 공부할 그런 뜻으로 갔습니다.”

그가 스티븐스 처단 의거 이후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통해서도 그가 왜 하와이 이민을 택하게 되었는가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시 이도형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그런 전명운 의사가 미국에 오게 된 이유, 배경 같은 거는 의거가 일어났을 때 전명운, 장인환 의거가 일어났을 때 인제 심문에서 진술한 내용을 보면 자기는 인제 공부하러 왔다. 그래서 미국의 근대적 학문을 배워서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이바지하겠다 그런 뜻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봐 가지고 전명운 의사는 인제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한인 노동자로 온 전명운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했습니다. 전명운이 처음 갔던 곳이 어느 곳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초기 한인들이 오아후(Oahu)섬의 사탕수수농장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 또한 오아후섬의 한 농장에서 노동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경인일보)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경인일보)

하와이 농장에서 전명운의 생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여러 농장을 전전하면서 노동으로 호구를 해결하고 돈을 모아 미국 본토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 하와이에 이민 온 한인들은 대부분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했지만, 임금과 대우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 미국 서부로 이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명운도 하와이에서 1년간 노동을 하다 이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04년 9월 23일에 미주 본토에 건너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전명운은 한인단체를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한인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 본토에 온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명운도 상항한인미션을 찾아갔습니다.

상항한인미션은 1903년 9월 안창호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 거주 한인들이 모여 가정예배를 시작함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는 상항한인미션에 거주하면서 생활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다녔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농장이나, 철도공사장, 광산 등을 전전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상항한인미션에 숙소를 정한 전명운은 공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1905년 12월 21일자 공립신보에 따르면 전명운이 회관 건립을 위해 의연금 5원을 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공립협회에서는 토요일마다 공립관에서 토론회가 개최됐는데, 전명운은 매주 토론회에 참석하여 국권회복을 주제로 토론도 하고 연설도 했습니다. 또한 전명운은 매주 일요일에 상항한인청년회가 주최하는 토론회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는 1908년 2월 한인청년회에서 초청한 토론회에서 ‘모험시대’라는 주제로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명운은 사업에 뛰어들어 한국 동포들의 알래스카 취업을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명운의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전명운이 신한민보에 광고를 내고 알래스카 인부를 모집하던 중 친일 외교관 더햄 스티븐스가 미국에 와서 망언을 일삼은 기사를 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처음 계획했던 노동주선 사업은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명운은 동포들에게 알래스카 어업을 주선하여 동포사회에 공헌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모든 일이 충분히 되면 알래스카로 떠나려고 할 때, 스티븐스가 도미하여 한국에 대한 망언을 일삼게 되자 그를 처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스티븐스가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스티븐스의 공식 직함은 대한제국 외교고문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면서 을사조약을 했고 정미조약을 체결했는데, 1907년 정미조약으로 이른바 차관 정치를 하게 되고 고문 정치를 하게 되는데 대한제국의 모든 부서에 인제 외국인 고문을 두게 했습니다. 그래서 외교 문제를 대한제국 외교를 담당할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추천했는데, 스티븐스은 원래 인제 일본에 있는 미국 공사관이죠?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스티븐스를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추천을 했고 그래서 인제 그래서 일본의 인제 한국이 식민지화를 위해 활동하던 인물입니다.”

일본은 스티븐스가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대외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고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그에게 기밀 내훈 3조건을 엄수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낭독: 기밀 내훈 3조건] 한일 외교를 수행할 때 외교상 중요한 안건은 재한제국공사와 협의한 후 그의 동의를 얻어서 조치할 것. 제국정부의 대한 방침은 수시로 제국공사에게 내시할 터인즉 귀하는 이에 배치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 한국 외교상 중요한 관계사항은 신속하고도 숨김없이 제국공사에게 통보해야 하며 또한 제국정부에 대하여 어떤 보고나 의견을 제출할 경우에는 제국공사를 경유하거나 직접 외무성에 제출할 것.

이 3조건은 스티븐스가 일본 정부나 재한일본공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꼭두각시 역할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스티븐스는 훗날 한국의 국권을 제약한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섬으로써 한국인들의 큰 원성을 사게 됐습니다.

당시 재미한인들은 공립신보를 통해 한국에서의 스티븐슨의 언동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1906년 1월 8일 공립신보에 실린 한 기사에서는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틴븐스가 미국 정부에 을사늑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실었습니다.

[낭독: 공립신보 기사] 일본이 한국 정부를 병력으로 위협하여 얻은 약조가 아니라 그 약조에 대하여 대한제국 관료 몇 사람은 반대하였으나 그 외에 관료들이 낙종하여 도장을 찍었으니 실상은 일본이 위협함이 아니요 . 그리고 한국 황실에 일병이 들어간 것이 없고 다만 이토 히로부미를 보호한 일본 순검 5, 6명뿐이었다.

하지만, 미주 한인들은 을사늑약에 대한 스티븐슨의 태도에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8년 일본 정부가 스티븐스를 미국에 파견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갑산동광을 둘러싼 미일간 이권교섭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만주지역을 둘러싼 문호개방정책과 이민 문제를 두고 악화한 미국 내의 반일감정을 누그러 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08년 3월 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2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이러한 스티븐스의 일정은 1908년 3월 14일에 보낸 전보를 근거로 하여 공립신보는 ‘일탐도미’라는 제목으로 게재했습니다.

이처럼 미주 한인들은 스티븐스를 일본 밀정으로 표현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전명운 두 번째 시간으로 전명운의 도미 후 생활과 전명운이 저격을 시도한 스티븐스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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