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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1) 미국행 동기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전명운 (1) 미국행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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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전명운 첫 번째 시간으로 도미 전 활동과 미국에 건너오게 된 동기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전명운 첫 번째 시간으로 전명운의 도미 전 활동과 그가 미국에 건너오게 된 동기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더햄 스티븐스 처단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기 때문에 국내에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한인들에게 민족독립과 국권회복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은 사건이었습니다.

스티븐스는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는데 온갖 노력을 경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국민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키고자 했으며, 이 같은 그의 친일적 견해를 언론을 통해 미국사회에 전파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주한인들은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에 분개하여 그의 발언을 취소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미한인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견을 계속적으로 주장했고 한인들은 그에 대한 처단만이 왜곡된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스티븐스의 처단의거는 단지 친일적 언사를 일삼는 미국인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한국을 병탄하고자 하는 일본정객들과 친일파에 대한 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스티븐스의 발언이 나오자 미주한인 대부분은 그를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그 실제적 행동은 전명운과 장인환에 의해 실행되었습니다.

전명운의 이력은 출생년도부터 매우 불명확한 점이 많습니다.

헤이그특사인 이상설이 신한민보 에 게재한 「양의사 합전」에 전명운의 “적은 담양이오. 대로 한성에 있어시니 나이 장의사 보다 다섯 해가 적으니라”라고 하여,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장인환보다 다섯 살이 적다고 했습니다.

전명운 (우리역사넷)
전명운 (우리역사넷)

「양의사 합전」에 장인환의 출생년도를 1878년생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전명운은 1883년생이 됩니다. 또 다른 자료인 신한민보에 게재된 「장전 양의사의 약사」에 의하면, 장인환은 정축년(1877) 3월 11일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명운은 그 보다 다섯살 적은 1882년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명운에 관한 기록은 출생년도부터 정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원용의 재미한인오십년사와 독립운동 공훈록에는 1880년 5월로 기재되는 등 출생년도와 생년월일이 전혀 일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사 전명운이라는 평전은 쓴 장백일은 족보와 신한민보에 실린 전명운의 부고에 의거하여 1884년 6월 25일이라고 하였는데, 족보에도 1884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84년이 정확하다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전명운이 스티븐스 의거 후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성명은 전명운. 연령은 25세”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84년생이 정확하고, 전명운 자신도 경찰에는 1884년 5월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전명운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 기거한 것으로 보아 그는 지금의 종로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명운 집안은 제24대부터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서울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던 것 같습니다. 전명운의 아버지 전성근은 상업활동을 하다가 전명운이 청소년기에 사망했습니다.

전명운의 형제관계는 3형제 중 둘째 아들이라고도 하고, 「부고」에는 일곱 번째 아들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양의사 합전」에 “형제가 단조”하다는 것과 대동보 상에 형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3형제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이 전명운의 가정환경은 아버지가 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집안살림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다고 아주 유복하지도 않은 서울의 중산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울의 상업적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매우 진취적인 성향을 가졌으며,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성장기에 전명운은 한국이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근대국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전명운의 나이 15,16세 경 서울에는 독립협회가 설립되어 서구의 민권사상과 부국강병을 위한 토론회 등이 개최되었고, 그가 살고있던 종로에는 만민공동회의 집회가 열리는 등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있었던 전명운도 한국의 근대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통하여 유신사업”에 일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전명운이 국내에 있을 무렵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는지 현재 자료 부족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양의사 합전」에 의하면 전명운은 ‘학교당’에 가서 댕기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익혔다고 하는데, 아마도 당시 서울에 세워졌던 근대적 학교였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후 전명운은18세 무렵인 1902년 6월 2년제의 관립 한성학원에 다녔다고 하는데, 아마도 서울에서 중등교육 정도의 학교를 다녔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자료상에서 확인은 불가능합니다.

중등교육을 받은 이후 전명운은 가업을 이어받은 그의 형 전명선의 밑에서 아버지가 물려준 포목과 남도 죽물을 취급하는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한편, 전명운은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기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 종교인 기독교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서양의 발전된 문명 세계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생각됐습니다. 처음 전명운도 독립협회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독교계 인사들과 접촉하였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초기 하와이로 이민 온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명운은 기독교를 통해 음으로 양으로 서양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로 보아 전명운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기 전 기독교에 일정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청소년기부터 전명운은 매우 풍운아적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형밑에서 가업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지만 전명운에게는 내심 신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발달된 문명세계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켜야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업에 종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업에 얽매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즈음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와이 이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떠나 새 삶을 찾으려고 ‘이민’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인과 충돌해 한 천주교 성당에 숨어 있었던 전명운은 그곳에서 전부터 알고 있던 한 신부를 만났습니다.

이 신부는 전명운에게 작은 일로 개인의 일생을 망치지 말고 국가를 위해 앞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미국행을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국력을 키워 조국의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이민을 결심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 도착자 명단에 의하면 전명운은 당시 나이 20세, 기혼, 서울 거주, 배 이름 도릭호, 1903년 9월 21일 도착으로 돼 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이도형 박사는 전명운 의사가 원래 유학을 목적으로 태평양을 건넜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대부분의 미국 이민은 하와이 이민부터 시작이 됐는데 하와이로 이민을 오는 분하고 북미로 가는 부류가 있는데 하와이는 노동이민으로 가는 거고 북미로 가는 분들은 대개 유학이나 혹은 상업을 위해서 가는데 전명운 의사도 하와이 이민을 갔습니다. 근데 하와이 이민은 알다시피 사탕수수 농장에 노동이민으로 가는 것인데 전명운 의사는 노동자로서 가서 거기서 인제 돈을 벌어서 인제 성공하겠다는 그런 생각보다는 유학을 목적으로 갔습니다. 직접 미국에 가기가 힘드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전명운 의사는 하와이 이민을 일단 갔다가 거기서 인제 북미로 가서 근대적인 학문을 공부할 그런 뜻으로 갔습니다.”

그가 스티븐스 처단의거 이후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통해 그가 왜 하와이 이민을 택하게 되었는가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다시 이도형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이도형 박사] “그런 전명운 의사가 미국에 오게 된 이유, 배경 같은 거는 의거가 일어났을 때 전명운, 장인환 의거가 일어났을 때 인제 심문에서 진술한 내용을 보면 자기는 인제 공부하러 왔다. 그래서 미국의 근대적 학문을 배워서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이바지하겠다 그런 뜻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봐 가지고 전명운 의사는 인제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전명운 첫 번째 시간으로 전명운의 도미 전 활동과 그가 미국에 건너오게 된 동기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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