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5) 동지회 활동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5) 동지회 활동
please wait

No media source currently available

0:00 0:10:32 0:00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 마지막 시간으로 이승만의 동지회 활동과 동지회 독립운동의 성격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이승만은 1924년 11월 하와이 한인대표회에서 결정한 경제적인 자급자족의 방안을 실현하기 위해 동지촌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1925년 12월 13일 기왕에 계획된 동지합자회사를 동지식산회사로 바꾸었습니다.

회사자본금은 7만 달러로 책정했고 회사가 발전하면 20만 달러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동지식산회사는 부동산과 동산을 매매, 저당, 교환, 전당잡거나 도로를 건설하고 시설을 관리하는 건설활동까지 폭넓게 사업을 계획하고 설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지식산회사는 이승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홍선표 박사는 동지식산회사가 심각한 자금부족에다 사업능력도 뒷받침되지 못해 결국 파산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처음부터 자본이 부족했었어요. 자본이 부족한 데다가 이승만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경영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정치활동은 잘하지만 상업적 경영은 또 다른 마인드거든요? 이런 경영 식견이 없는 사람들이 경영에 뛰어든 거야. 특히 이승만이 주관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경영이 어려웠죠. 그런 상황에서 (19)29년 10월에 미국에 경제대공황이 불었잖아요? 그러면서 미국 전체가 다 어려운 상태에요. 한인들은 더 어렵죠? 그러니까 이 자본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는 거죠. 여기에다가 투입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1930년 10월에 보면 부채가 2만 달러 정도가 돼요. 그래서 (19)31년 4월에 영업을 정지하고 결국 파산 처리를 하게 되죠. 그래서 기존에 있는 부지는 유니언 트러스트 컴퍼니에 1만 2천500달러로 매각을 하죠. 그래서 이런 참담한 실패를 맛봅니다.”

동지식산회사가 실패한 뒤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동지회 조직을 확충하며 대대적인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동지식산회사 실패로 위축되어 있던 이승만은 하와이 내 통일운동의 기운과 한국 광주학생운동으로 나타난 독립운동의 열기를 이용해 동지회 부흥을 꾀하려고 이른바 ‘동지미포대회’를 개최했는데요. 다시 홍선표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그래서 동지회 중심으로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동지미포대회란 걸 개최를 합니다. 하와이 내 한인 단체 대표와 미국 본토의 동지회 대표까지 다 모아가지고 아주 큰 일주일간 대대적인 대회를 열어요. 근데 이 대회를 통해서 나타난 결과는 뭐냐 하면은 동지회를 독립운동의 유일무이한 정치단체로 인정을 하겠다, 또 그렇게 하겠다 결의해요. 또 그걸 위해서 헌장을 만들죠. 헌장을 통해서 동지회는 유일한 정치단체다. 그러니까 유일한 정치단체라는 것은 뭐냐 다른 단체는 정식 단체가 아니니까 동지회 중심으로 모이라 결집해야 한다는 이런 뜻이겠죠? 그리고 동지회 이상을 재정립하고, 그리고 이제 구미위원부라는 이승만이 설립한 외교기관을 적극 후원하는 일을 할 거다. 그리고 총재 이승만의 권한을 헌장을 통해서 대폭 강화를 합니다. 그래서 종신 독재 체제의 총재로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이승만의 위상을… 동지회 정치단체를 강화하면서 이승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통과시키면서 외형적으로는 성공을 했죠.”

한편 1930년대 중반부터 동지회는 회복한 회세를 바탕으로 하와이 한인사회의 합동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35년부터 하와이 한인 사회에는 동지회와 대한인국민회 사이에 합동의 기운이 일어났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홍선표 박사는 두 단체의 합동 노력이 외형적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동지회와 국민회가 우리가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말고 힘을 합쳐서 독립운동을 전개합시다 해서 나온 게 (19)37년에 (19)38년에 두 차례에 걸쳐 합동운동이에요. 그래서 (19)37년 합동운동에서 동지회와 국민회 중심으로 합동… 그러나 성사는 못 됐고… (19)38년에도 다시 시도를 했는데. 또 성사를 못봤죠. 그런데 두 차례 합동운동은 사실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게 실패가 아니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19)20년대 (19)30년대 초반에 법정소송까지 갔던 분쟁과는 달리 이때의 합동운동은 아주 목적도 좋았고 또 서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없었어요. 충돌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충돌이 없이 서로 독립운동을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그런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마는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동지회 북미 총회
1960년대 동지회 북미 총회

한편 1940년 9월 2일 북미 국민회는 하와이의 국민회와 동지회에 대해 광복 대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서로 합동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런 제의에 따라 11월 5일부터 두 국민회와 동지회 대표가 하와이에 모여 합동준비위원회를 열고 결의안에 합의했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홍선표 박사는 이 결의안에 의거 세 단체가 이른바 ‘해외한족대회’ 개최 준비에 들어갔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그래서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미주 전체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를 한 거죠. 이 해외한족대회는 주축이 북미 국민회, 하와이 동지회, 하와이 국민회, 이 세 단체가 사실은 주관을 했고, 지도를 했죠. 그래서 이 해외한족대회의 결과로 그 당시 최대의 독립운동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만들게 되고 그리고 대미외교의 기관으로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를 하죠. 과거 이승만이 설치했던 구미위원부가 이름을 바꿔서 주미외교위원부라고 했는데 영문명은 똑같아요. 그건 이승만이 의도했던 바에요. 그러면서 초대 위원장을 다시 이승만을 앉힙니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앉힐 수 밖에 없던 것은 해외한족대회 주관이 동지회였어요. 그 동지회 입장을 고려해서 총재였던 이승만을 다시 외교대표로 앉히는데, 이 주미외교위원부가 해외한족대회에서 미주한인의 기관으로는 재한족연합위원회이지만, 외교는 정부의 공식 기관이 돼야 한다는 논의를 통해서 중경 임시정부에 정식 외교기관으로 요청을 해요. 그래서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정식 외교기관, 대미 외교 기관으로 인정을 해줘요. 그리고 이승만에게 대미 외교의 전권을 줍니다.”

그런데 동지회와 국민회와의 연합으로 탄생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이하 연합회)는 주미외교위원부 확장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연합회 집행부가 제1차 전체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 사무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충돌한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연합회 집행부를 이끌고 있던 김호 대 이승만 간의 알력이었습니다. 김호는 전경무와 함께 1942년 10월부터 워싱턴의 외교사정을 조사하면서 주미외교위원부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홍선표 박사는 이런 갈등이 결국 동지회의 독자노선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북미 한인들도 국민회에 대해 반감을 가진 세력들이 있어요. 그러면서 대신 이승만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일어납니다. (19)42년말부터 (19)43년 초 다뉴바와 LA에서 민중대회라는 형식으로 일어나는데 왜 정부 대표 기관인 주미외교위원부와 그 대표인 이승만을 민간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부당하게 간섭하고 이렇게 재정을 가지고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느냐, 반발을 하죠. 이 민중대회는 결국은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전환을 하거든요. 그렇게 해서 분위기가 동지회뿐만이 아니고 동지회 외적 세력들도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죠. 자, 이걸 이용해서 미국 본토의 동지회가 세력을 확장시키죠. 그리고 나서 북미 지방총회를 만들어요. 나중에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를 만들죠.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세력을 하와이뿐만 아니라 북미 지방에서도 동지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필적할만한 그런 세력이 된 거예요. 힘이 생긴 거죠. 이승만의 입장에서. 자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돈도 우리끼리만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금, 모금을 하고 동지회 세력은 점점 커지고… 이러다 보니까 (19)43년 12월 23일날 드디어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를 선언을 하죠. 그리고 독자 노선을 걷습니다.”

동지회의 설립과 활동을 통해 볼 때 이승만은 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승만을 종신, 독재의 총재 체제로 두고 해방 때까지 유지한 단체는 동지회를 제외하고는 미주한인 사회에 없었는데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홍선표 박사는 동지회는 동지회 ‘헌장’에 규정된 것과 달리 자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독립운동의 전개 모습은 설립될 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약 25년 정도를 보면 직접 독립운동을 나선 적은 거의 없었어요. 다 이승만을 내세웠고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지원하는 형태였고 또 이승만이 외교활동을 할 때 재정후원, 또 이승만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이 된 이후엔 또 재정후원으로 나타나죠. 그러니까 직접적인 독립운동보다는 이승만이라는 인물,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그가 소속한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한 간접적인 지원을 통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니까 동지회의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직접 대표를 보내가지고 뭐 선전 외교를 나서거나 그런 적보다는 그래서 외교는 단 1명이에요. 이승만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총재 이승만 또 그것도 종신 총재로 하면서 이승만을 위한 이승만에 의한 동지회, 그러니까 동지회의 독립운동은 곧 이승만을 돕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다라고 보죠.”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이승만’ 마지막 시간으로 이승만의 동지회 활동과 동지회 독립운동의 성격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