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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4) 동지회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4) 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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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이승만 네 번째 시간으로 동지회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 네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의 동지회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대한인동지회는 하와이 및 북미의 대한인국민회와 함께 중요한 한인 단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동지회의 위상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이승만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동지회는 이승만에게 분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승만과 생사고락을 거의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동지회는 이승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지회는 어떤 배경에서 설립이 됐을까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홍선표 박사는 동지회가 설립이 되는 배경은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 임시정부를 둘러싼 바깥 세력들과의 관계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임정의 대통령이었지마는 상해에 부임을 못했어요. 그래서 계속 오라고 하는데 독립운동이 바쁘니까 못 간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가야 할 시기가 와서 1920년 12월에 상해로 들어가죠. 그리고 (19)21년 5월까지 임시정부 요원들을 직접 만나고 그리고 실제로 대통령으로서의 행사를 하죠, 한 6개월 동안… 그때에 임시정부에 대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임정 내에 있는 자신의 측근으로부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안현경인데, 그 사람이 이미 그 전에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이 돼서 임정의 내부 상황을 속속히 이승만에게 알립니다. 계속… 내부 정보를… 당시 편지가 28통 정도 되는데, 그러면서 어느 정도 임정의 상황을 파악을 하고 있었죠.”

초기 임정의 내막을 속속들이 보고해온 안현경은 상해로 떠나려는 이승만을 도와 상해 임정의 상황과 정세에 대한 세세한 보고는 물론 그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직접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 겪은 현실은 안현경을 비롯한 상해 통신원들의 보고 이상으로 심각한 상태였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다시 홍선표 박사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첫째는 임시정부의 조직 정비와 재정 확보, 향후 독립운동 방향, 이런 걸 둘러싸고 임정 각료들 간의 의견이 상당히 화합이 안 되고 불일치된 상태란 것을 보게 되죠. 그래서 이 때문에 거의 결별 수준이라는 상황을 알고 있고. 두 번째는 이동휘가 국무총리였는데, 사회주의계 세력들이 세력을 크게 확장을 하고 있었고, 이 세력들이 반이승만 세력으로 결집하고 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임시정부 바깥에 특히 북경, 베이징에서 반임정 세력이 결성이 되고 있었어요.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결성을 해서 반임정과 함께 반 이승만 활동에 주력하고 있었어요.”

군사통일위원회는 표면상 연해주와 북만주에 흩어져 있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개혁과 이승만 타도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직면해 있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는데요. 홍선표 박사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네 번째로는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해서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참여를 하는데 이 안창호가 이승만과 협력하면서 경쟁했어요.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협력하면서 서로… 그런데 안창호를 보니까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결성을 해서 안창호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마지막으로는 임정 내와 외부에서 임정개혁론이 대두됩니다. 임정을 이대로 두면 안된다 개혁을 해야 된다… 상해 내 박은식, 김창숙, 원세훈 이런 인물들이 한 14명이 (19)21년 2월에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지 바로 얼마 안 돼서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고 해 가지고 임시정부는 개혁을 해야 한다라는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죠. 이것은 나중에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 개최로 연결이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이런 어려움에 처했던 이승만은 결국 1921년 6월 29일 하와이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돌아온 즉시 동지회 설립에 착수한 것을 보면 상해 체류 경험에 비추어 임정의 현상 유지 방안만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상해 임정이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서 이승만은 도미 직후 자신만을 위해 절대로 지지해줄 강력한 정치단체가 꼭 필요했습니다. 이는 결국 동지회 창립으로 이어지는데요. 다시 홍선표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19)21년 6월 29일에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을 해요. 그리고 이승만이 상해 임정에서 돌아온 것을 기념을 해서 (19)21년 7월 7일에 이승만을 위한 환영식을 대대적으로 하는데 대한교민단 총회단에서 하와이 한인 대표 약 39명이 모여서 ‘위하해’라는 이름으로 환영회를 결성을 하죠. 그래서 이때 이승만 임정 대통령과 임시정부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래서 단체를 결성하자고 한 게 동지회 설립 결의를 한 거죠. 이날… 그래서 동지회가 설립이 되고 일주일 후 7월 14일에 민찬호, 안현경, 이종관을 명의로 해서 15개 조의 동지회 규정을 발표를 하죠.”

그런데 15개 조 동지회 규정에 나타나는 동지회의 설립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상해 임정을 옹호하며 대동단결을 도모하겠다는 것이었는데요. 독립운동사 연구가 홍선표 박사는 이번 대외 명분용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그때 이 동지회가 설립되는 목적이 뭐냐. 목적이 중요하잖아요?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를 옹호하면 대동단결을 도모한다. 이거 설립목적을 내세운 거예요. 이 임시정부를 옹호한다, 명분이 참 좋고 이때 이를 위해서 대동단결을 도모한다, 좋은 의미에요. 그런데 이때 대동단결에 담긴 의미는 임정 옹호는 곧 임정 대통령인 이승만을 옹호하는 것과 같았고, 대동단결은 이승만 중심으로 대동단결한다는 의미가 사실상 내포되어 있었다고 해석이 됩니다. 이때 조직 목적에서… 그래서 동지회를 조직을 할 때 회장이 없는 거예요. 주무원, 서기, 재무로만 구성을 했고 그래서 나중에 개편을 해서 중앙부를 만들어서 이사원 제도를 만드는데 그때도 중앙부장이 대표 역할을 했고, 실제 대표가 없어요. 그래서 대표는 누구냐 나중에 정강을 만들 때에 이승만을 총재로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동지회는 출발부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해서 대동단결을 외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이라는 점으로 출발을 했었습니다.”

대한인동지회 건물 (미주한국일보 자료)
대한인동지회 건물 (미주한국일보 자료)

동지회는 1924년 11월 17일부터 20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대표회를 통해 조직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동지회는 이 자리에서 정강을 만들어 조직 이념을 재정비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홍선표 박사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동지회가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단체로서 발족했고, 발족하려면 나름대로의 어떤 기본 질서가 있어야 되 잖아요? 그래서 만든 게 정강인데 1924년 11월 17일부터 20일까지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한인대표회의를 개최를 합니다. 24개 동지회 지방회 대표와 함께 교민단, 한인기독학원, 7개 단체 대표해 가지고 총 34명의 대표들이 여기에 참석을 해요. 그런데 (19)24년 11월이 어떤 시기냐 하면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탄핵을 두고 계속 격렬하게 논쟁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승만을 언제 탄핵을 하느냐 탄핵 문제를 두고 시끄러울 때에요. 그래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논쟁이 있었고, 그래서 이승만의 입지가 아주 극히 불안하고 위험할 때였어요. 이럴 때에 하와이의 한인대표회를 개최해서 3대 정강을 제정을 하죠.”

동지회가 제정한 3대 정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낭독: 3대 정강] 첫째. 우리의 독립선언선에 공포한 바 공약 3장을 실시할지니 3.1정신을 발휘하여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여 비폭력적인 희생적 행동으로 우리의 대업을 성취하자. 둘째 조직적 행동이 성공의 요소이니 우리는 개인행동을 일절 버리고 단체 범위 안에서 질서를 존중하며 지위를 복종하자. 셋째,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니 자족자급을 함께 도모하자.

동지회는 정강에 이어 4대 진행방침도 정하는데요. 3대 방침과 4개 정강의 특징과 관련해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가 홍선표 박사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홍선표 박사] “그래서 3개 정강, 4대 행동방침 해서 동지회를 새로 규정을 하는데 문제는 동지회가 21년 7월에 규정을 만들 때는 제1조가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대동단결을 도모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임정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요. 3대 정강에서는 그래서 대업 성위를 위해서 분명한 목표 설립이 당초 설립 목적은 임시정부였어요.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건데 이제 없고 동지를 확보하고 지위에 복종하고 일치된 행동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고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동지회, 하와이 대표회의에서는 동지회를 총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새로 결집시키고 자급자족의 한인 경제 건설을 도모하겠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결정한 것은 이승만 탄핵을 앞둔 동지회의 독자적인 활동방침을 미리 제정했다고 봐요. 그리고 이것이 끝난 뒤에 (19)25년 3월에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 조치하면서 면직을 처리하거든요. 그래서 이때부터 이승만과 임시정부는 결별을 해요. 그 결별과 함께 동지회는 그동안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해서 설립된 단체가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단체로 전락을 합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이승만’ 네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의 동지회 활동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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