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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3) 태평양잡지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3) 태평양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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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이승만 세 번째 시간으로 태평양잡지 발간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 세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의 태평양잡지 발간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13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각 지역을 순회하고 돌아온 후 국문 잡지 발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원래 이승만과 동료들은 영문신문 발간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는데요. 한국 이승만연구원의 오영섭 교수는 재정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잘 아시다시피 영문잡지나 영문신문을 출간하려면 전문 인력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 제대로 영어로 대학교육까지 받아서 글을 쓸 수 있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영어로 된 잡지나 신문을 펴내려면 재정이 상당히 확보가 돼야 되거든요? 근데 그 당시에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숫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한인들이 내는 지원금만으로는 영문잡지나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이런 경제력이 되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염원은 끊임없이 영문신문이나 잡지를 펴내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그리고 인력의 확보 문제 때문에 현실화시킬 수는 없었던 그런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구상이 당장 구현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문잡지라는 차선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13년 9월 1일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를 창간했습니다.

'태평양잡지' 표지 (이승만기념관 소장 사진)
'태평양잡지' 표지 (이승만기념관 소장 사진)

태평양잡지 발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승만은 평생을 정력적으로 언론 활동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렇게 언론 활동에 힘을 쏟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국 이승만연구원 오영섭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이분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언론 활동을 통해서 순 한글의 민중 계몽 또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글, 이런 것들을 널리 배포해서 한국 사람들 의식을, 독립 의식을 고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 기반을 마련해 나간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민중들에 대해서 쉬운 한글로 좋은 글들을 널리 전파해서 한국 사람들의 정치 인식, 한국 사람들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 이런 것을 확대하고 신장시켜 나가서 한국인들이 독립을 달성하는 과정 속에서 훌륭한 인적 자원이 되기를… 건국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인적 자원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거든요? 그런 의도 때문에 이승만 박사는 언론 활동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학생 생활부터 중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태평양잡지에 실린 글들은 한국 독립과 관련된 이승만의 생각이 잘 반영돼 있습니다. 바로 실력양성론적 독립노선인데요. 한국 이승만연구소 오영섭 교수로부터 실력양성론적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봅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현실적으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이루는 상태에서 한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축적해 나가는 것… 이것을 이승만 박사는 중시했어요. 그런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방식을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외교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거든요. 한국인들이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을 자체 내에 축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힘을 축적한 상황 속에서 그런 힘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 미국과 일본의 전쟁과 같은 국제적인 대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최후의 독립을 달성해 나가야 된다. 이렇게 이승만 박사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현실적으로 바로 직접적으로 무력전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무력적인 독립운동을 달성할 수 있는 최후의 방안에 근본적인 기반을 수립하는 문제, 다시 말씀 드리면 교육이나 상업이나 이런 경제적인 진흥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한국의 독립운동의 힘을 축적하는 이런 쪽에 이승만 박사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승만의 이런 생각은 태평양잡지의 발간 취지로 이어지는데요. 다시 오영섭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그래서 이분이 태평양잡지 같은 잡지를 발간해서 한국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의식, 한국 사람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이런 것을 신장시켜 나가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여나가고 이런 과정 속에서 근본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힘을 축적해 나간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 거죠. 자신이 그런 독립을 향한 힘을 축적해 나가는 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태평양잡지를 발간한 것입니다.”

태평양잡지는 일종의 월간 종합잡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잡지 안에는 잡다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한국 이승만연구원 오영섭 교수는 그 내용을 보면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첫 번째로 국제정세와 외국 사정 및 외국 지도자들의 동정 문제, 그리고 두 번째로 동서양의 정치 사상과 정치 제도, 뭐 공화정치라든가 이런 것들을 소개하는 기사들, 그리고 미국의 대내외적인 정책과 미국 대통령들의 동향, 그리고 네 번째로 한국 민중 계몽 문제와 전통적인 풍습의 개량 문제, 그리고 다섯 번째로 일제 식민 통치가 어떤 상태이고 또 현재 한국 사람들의 실정은 어떠했는가 이런 문제들, 또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미국이나 상해나 이런 지역에서 굉장히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런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의 단합 문제와 민심의 합일 문제, 이런 것을 논하고 있고요. 그리고 또 재밌는 것은 일곱 번째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서 이승만 박사가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거든요. 또 동시에 기독교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태평양잡지에는 한국 기독교계의 동향과 안창호 같은 여러 민족운동가의 동향이 어땠는가도 상당히 비중 있게 들어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승만과 임시정부 노선 옹호 및 반이승만 세력 비판, 동지회 관련 기사, 하와이 내 이승만 관련 단체 동정 소개, 번역이나 번안한 일기와 소설, 그리고 사고 및 광고 등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태평양잡지에서 이승만이 직접 쓴 논설도 중요합니다. 이승만은 이런 논설에서 먼저 자치 운동과 영세중립국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는데요. 이승만연구원 오영섭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태평양잡지에 비중 있게 실려있는 논설들이 자치 운동의 문제, 영세중립국에 대한 관심의 문제… 이 두 가지가 태평양잡지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논설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가 왜 자치나 영세중립국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가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10년대에 필리핀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점차, 국가적인 국민적인 힘을 길러서 미국으로부터 자치정부를 인정받는 이런 과정 속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 이걸 이승만 박사가 굉장히 유의 깊게 보면서 상당히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아일랜드가 어떻게 독립을 위해서 영국과 전쟁을 벌여서 승리를 하고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가지고 영국 여왕의 지배를 받기는 하지만 내치는 독립상태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가 이런 것도 굉장히 이승만 박사가 중시했던 것 같거든요.”

이승만은 또 논설에서 문명진보론과 인심개량론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다시 이승만연구원 오영섭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그 외에 예를 들어서 민심의 개량 문제, 이런 것도 이승만 박사가 매우 강조한 그런 내용인데요. 민심의 개량이나 문명을 진보시키는 이런 문제는 대체로 봐서 이승만 박사가 구상하고 있는 신국가 건설 구상과 맥이 닿아 있는 그런 문제였습니다. 그런 기반을 닦기 위해서 이제 민심도 단합해야 하는 그런 문제가 있고, 인민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풍습들을 개량해야 하는 그런 문제도 있고, 인민들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지식을 획득해야 하는 그런 문제도 있고, 바로 그런 문제를 태평양 잡지에서 누차 강조를 했습니다.”

태평양잡지가 발간된 것은 상당히 장기간이었습니다. 1913년 9월부터 1930년 11월까지 총 17년 3개월 동안 발간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기간 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온 호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재정난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승만이 개인적으로 잡지 발간을 책임을 지면서 잡지 발간 비용, 인쇄 비용 출판 비용을 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태평양잡지는 17년 동안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이 발간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 이승만연구원의 오영섭 교수는 태평양잡지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녹취: 오영섭 교수] “첫 번째 태평양잡지는 이승만 박사와 이승만 지지세력의 독립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언론매체였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주 한인 사회에서 캘리포니아에서 발간되었던 신한민보는 주로 안창호 선생의 지지자들이 발간했던 신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승만 세력은 신문은 발간하지 못하고 잡지는 발간했는데 그것이 태평양잡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태평양잡지를 통해서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독립사상을 효과적으로 미주 사회에 알리고 원동(동아시아)에까지 전파하고 이런 활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죠. 그리고 두 번째로 태평양잡지는 한국 사람들이 염원으로 가지고 있었던 영문 잡지 발간을 위한 전초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사업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영문 잡지와 영문 신문을 펴내려면은 뭔가 사전 작업이 필요한데 그 작업으로서 현실적으로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순 한글로 잡지를 펴내는 이런 일을 인제 이런 일에 착수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이승만’ 세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의 태평양잡지 발간 활동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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