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2) 한인 중앙학원의 의의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2) 한인 중앙학원의 의의
please wait

No media source currently available

0:00 0:10:34 0:00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 두 번째 순서로, 한인중앙학원의 운영과 교과과정, 의의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었던 한인중앙학원의 운영과 교과과정, 그리고 한인중앙학원의 의의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13년 이승만은 한인기숙학교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개교 이래 지금까지 교장을 맡아왔던 와드먼의 부인으로부터 학교 재정을 포함한 일체의 운영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이승만 연구가인 한국 국가보훈처의 윤종문 박사는 이승만이 이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이승만은 1913년 9월 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교육 역량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는 먼저 기숙학교를 하와이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학교명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변경합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박사를 받은 후 서울 YMCA에서 교육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교장 취임 이후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교과목을 영문과, 국한문 과정으로 세분화했으며, 성경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습니다. 이승만의 힘과 인기는 학생 수의 증가를 통해서 입증됩니다. 취임 이전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학생 수가 취임 이후 6개월 만에 3배가 넘는 103명으로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자 이승만은 한인 1.5 혹은 2세대들의 교육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이점이 바로 이승만의 힘입니다.”

하지만, 1914년 봄학기부터 한인중앙학원은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승만이 마우이섬을 둘러보고 한인 여자 5명을 데리고 왔으며, 한인중앙학원에 여자기숙사가 없어 수잔나 웨슬리홈에 기숙하도록 하였습니다.

미주 한인중앙학원 학생·교직원 기념사진 (이승만기념관 소장)
미주 한인중앙학원 학생·교직원 기념사진 (이승만기념관 소장)

그런데 웨슬리홈 관계자들이 웨슬리홈에 사는 여학생들이 한인중앙학원에 다니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1906년 하와이 감리교선교부가 학교를 세울 당시 감리교 이사부가 재정 지원을 한 감리교본부 여선교회에 한인중앙학교가 여학생 교육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1914년 봄학기부터 한인중앙학원을 남녀공학제로 개편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홈에 다니고 있던 한인 여학생들을 한인중앙학원에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거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들로부터 의연금을 걷어 들여 여자기숙사를 확장했습니다.

이후 이 여자기숙사 문제로 국민회, 그리고 감리교단과 갈등을 빚던 이승만은 1915년 4월경 한인중앙학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한인의 학교는 한인의 힘으로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한인중앙학원의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1915년 가을 학기부터 한인여학원을 설립했습니다.

1915년 한인중앙학원에서 독립한 이승만은 한인들의 의연금을 바탕으로 한인여학원의 건물을 신축함과 동시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를 움직여 예산의 대부분을 한인여학원 설립에 이용했습니다.

이승만의 한인여학원이 팽창하는 가운데 한인중앙학원은 쇠락의 길을 면치 못했습니다. 결국 감리교 총회의 재정지원만으로는 학교를 유지할 수 없었던 한인중앙학원은 1918년 9월 폐교됐습니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한인중앙학원은 존속 기간 학제가 조금씩 바뀌었는데요. 이에 대하여 한국 국가보훈처 윤종문 박사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학교의 학제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 4년,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6년제, 1916년 이후부터는 8년제로 학제가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인중앙학원이 한인사회에서 가지는 비중과 한인 학생들의 등교율이 높아진 결과였던 것입니다.”

다음 학교 재정을 살펴보면 먼저 학교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로부터 학비를 받았기 때문인데요. 다시 윤종문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학교 재정은 감리교단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지원금, 학생들이 납부하는 학비, 한인들의 개인적 후원금이었습니다. 학생 1인당 학비가 일년에 60달러였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배움의 공간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학교는 등록금 등의 장학금을 주었으며,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하와이 한인들의 의연금이 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학교 건물 보수 및 수리, 학생들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건물을 확장해야 할 경우 한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지원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다음 한인중앙학원의 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언어교육을 들 수 있는데요. 다시 윤종문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교육 내용을 보면, 두 가지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언어교육입니다. 언어교육은 영어와 국어교육이었습니다. 영어는 하와이, 나아가 미국이라는 생활문화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혀야 할 언어였지만, 국어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배우지 않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인1세대들은 향후 독립운동과 민족국가 건설의 주역이 될 자녀들이 한인으로서 정체성과 민족의식 함양을 위해서는 반드시 국어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같은 언어 교육에 이어 학생들은 특이하게 상무교육도 받았다고 윤종문 박사는 설명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학생들은 상무교육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상무교육이 강조된 것은 분명 특이할만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한국이 일본에 강제적으로 병합되어 가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조국이 국망이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문약’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상무정신을 기르고 상무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예컨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1909년부터 ‘연무부(鍊武部)’라는 부서를 통해서 무예훈련을 강조했으며, 1910년 한국이 강제병합 당하자 이제라도 독립을 위해서는 군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습니다. 한인중앙학원의 상무교육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중앙학원 학생들은 미국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과 병식체조를 교육받았습니다. 이처럼 한인중앙학원 학생들은 국어교육과 상무교육을 통해서 독립의식을 기를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이런 교육 받은 학생들이 성장하여 독립운동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인기숙학교와 중앙학원 출신들은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남다른 경력을 밟았습니다. 졸업자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하와이대학교 혹은 본토에 소재한 여러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한국 국가보훈처의 윤종문 박사는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예를들면, 기숙학교 졸업생 한시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졸업 후 1차대전 승전국들의 회담이었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으며, 하와이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진주만 침략이후에는 모든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고자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몸담았습니다. 한시대의 부인 박영숙도 기숙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박영숙은 미주한인 여성 단체였던 신한부인회,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합니다. 기숙학교룰 졸업한 두 남녀 학생이 결혼을 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입니다. 기숙학교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 유명한 인물을 배출해 냅니다. 바로 황진남입니다. 그는 졸업후 버클리대학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 외교선전부에서 활동합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으로 활동합니다. 해방 이후 그는 그 유명한 여운형 비서로 활동합니다. 이 외에도 차균상, 이석진 등이 흥사단, 중한민중동맹단 단원이 되어 독립운동 활동을 했습니다.

한국 국가보훈처의 윤종문 박사는 한인기숙학교, 한인중앙학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고 평가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1903년부터 시작된 하와이 한인 이민의 목적 중에는 자녀들의 교육시키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906년에 설립된 한인기숙학교는 설립된 지 1년 만에 하와이 당국으로부터 정식 학교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중앙학원 교원들은 미국인도 인정할 정도로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별도의 초등 교육을 받지 않고 상급고등학교와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종문 박사는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승만이 교장을 맡은 이후에는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를 만들다는 점이라고 지적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교육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성도 동등하게 교육을 받아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입니다. 실제로 이 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은 대한부인구제회, 신한부인회, 대한여자애국단 등 여성단체와 독립운동 기관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앙학원이 미주한인사회 나아가 한국독립운사에 있어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 학교 출신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사들이 졸업 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동지회 등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상의 점을 감안해 보면 한인중앙학원은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해낸 기관이었던 것입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이승만’ 두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었던 한인중앙학원의 운영과 교과과정, 그리고 한인중앙학원의 의의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