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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1) 한인중앙학원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이승만 (1) 한인중앙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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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 첫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승만 첫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민 온 한인들은 일찍부터 단체 및 교회의 설립을 우선시했습니다.

먼저 1903년 8월 신민회의 설립이 그것인데, 신민회는 한국에서 감리교인으로 활동하였던 홍승하, 윤병구, 안정수 등의 발기로 설립되었습니다. 단체의 설립과 더불어 이들은 한인 교회의 설립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03년 11월 한인들은 안정수와 우병길을 대표로 선임하여 한인감리교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교회 설립은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904년 존 와드먼 감리사가 부임한 이후 한인감리교선교회가 한인감리교회로 승격했습니다.

이승만 연구가인 한국 국가보훈처의 윤종문 박사는 단체와 교회에 이어 학교가 하와이 한인사회의 남은 한 개의 축이 됐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한국 국가보훈처 윤종문 박사] “하와이에 이민 온 한인들은 한인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갑니다. 그것은 단체 설립, 교회 운영, 학교 설립이었습니다. 단체-교회-학교는 한인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중요한 작동기제였습니다. 한인기숙학교는 한인감리교회 설립과 연동되어 움직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개신교인이었던 홍승하, 윤병구 등은 감리교회 미국인 관계자들과 접촉하여 한인감리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송헌주 등 한인 지도자들은 교육기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1905년 7월에 교육회를 만들었습니다.”

1905년 교육회를 만든 한인들은 남은 또 하나의 중요한 기관인 학교 설립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다시 윤종문 박사의 설명입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한인들은 자녀들을 교육시켜야 겠다는 일념으로 의연금을 모집하는 한편, 감리교 감독인 해밀턴에게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습니다. 바로 한인 1세대들과 감리교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한인감리교회 안에 학교 건물을 지었으며, 그 학교의 명칭을 한인기숙학교라 했던 것입니다. 즉, 한인기숙학교는 자라나는 한인1.5에서 2세대들이 미국에서 원활하게 생활하고 한인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기관인 것입니다."

1906년 7월에 설립된 한인기숙학교는 9월부터 학교 문을 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현순은 ‘하와이 유람기’에서 이 학교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낭독: 현순] 교사는 미국 남교사 1인, 여교사 2인, 한국교사 3인, 학도는 45명으로 출발하였다. 교육은 미국 과정에 의하여 초등-중등의 과정을 교수하였다.

현순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이 학교는 하와이 공립학교 초등교과 과정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영어, 국한문, 산수 등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기숙학교는 1907년 미국 정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미국 정부로부터의 정식 승인은 한인기숙학교의 질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고 이를 통해 많은 한인 남학생들이 이 학교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1912년 한인기숙학교에 한차례 위기가 닥쳤습니다. 위기를 조성한 사람은 바로 감리사 와드먼이었습니다.

당시 하와이에서 일본인이 발행하는 ‘일포시사’ 1912년 10월 5일 자에는 일본 영사가 한인구제금 750달러를 감리사 와드먼에게 전달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이 한인사회에 전해지자 한인감리교회 한인들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자신들의 자녀를 공부시킬 수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이렇게 한인들의 반발로 사면초가 상태였던 와드먼에게 행운의 인물이 하와이로 찾았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이승만이었는데요. 하와이에 입성한 이승만에게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고 한국 보훈처 윤종문 박사는 설명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이 하와이에 왔습니다. 독립운동가 박영만과 박상하의 초청으로 하와이 한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국민보 주필로 왔습니다. 그는 4월에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책을 저술하며, 교회 및 출판사업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와이 한인사회와 기숙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감리교회 관계자들간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기숙학교 운영자였던 감리사 와드먼이 호놀룰루 일본영사관에서 한인구제금 명목으로 750불을 받았습니다.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인들은 일본 돈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와드먼은 그것은 감리교회 일인데 한인들이 무슨 간섭이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인들은 와드먼의 태도에 분노했으며, 동맹휴학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하와이에 왔습니다. 와드먼은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명망가로 통했던 이승만이 이 분란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이승만에게 기숙학교 교장직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하지 많은 한인은 그를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감리사 와드먼은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했으며, 한국에서 상동청년회 시절부터 교육가로서 활동한 경험이 있던 이승만으로서는 와드먼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의 부탁을 박은 이승만은 호놀룰루에 사는 한인들의 감정을 추스르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와드먼은 자신의 부인을 대신해 이승만에게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맡아주기를 청했으며,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1913년 이승만은 한인기숙학교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개교 이래 지금까지 교장을 맡아왔던 와드먼의 부인으로부터 학교 재정을 포함한 일체의 운영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이승만 연구가인 한국 국가보훈처의 윤종문 박사는 이승만이 이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윤종문 박사] “이승만은 1913년 9월 기숙학교 교장을 취임하면서 자신의 교욱 역량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는 먼저 기숙학교를 하와이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학교명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변경합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박사를 받은 후 서울 YMCA에서 교육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교장 취임 이후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교과목을 영문과, 국한문 과정으로 세분화했으며, 성경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습니다. 이승만의 힘과 인기는 학생 수의 증가를 통해서 입증됩니다. 취임 이전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학생 수가 취임 이후 6개월 만에 3배가 넘는 103명으로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자 이승만은 한인 1.5 혹은 2세대들의 교육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승만의 힘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백인 사회에서 이승만은 뉴스메이커로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방지들은 이승만이 한인의 지도자이고 애국자이며 미국의 대통령들과 친분이 있다는 기사를 수시로 쏟아냈습니다.

이로써 한인 사회 안에서 이승만의 신망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1914년 봄학기부터 한인중앙학원은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승만이 마우이섬을 둘러보고 한인 여자 5명을 데리고 왔으며, 한인중앙학원에 여자기숙사가 없어 수잔나 웨슬리홈에 기숙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웨슬리홈 관계자들이 웨슬리홈에 사는 여학생들이 한인중앙학원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한인중앙학원 학생들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
한인중앙학원 학생들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

왜냐하면 1906년 하와이 감리교선교부가 학교를 세울 당시 감리교 이사부가 재정 지원을 한 감리교본부 여선교회에 한인중앙학교가 여학생 교육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반발했습니다.

[낭독: 이승만] 우리는 웨슬리홈을 조금이라도 주장하고 싶던지 간섭하려는 것은 없고, 다만 교육 일사에는 우리가 남의 일로 없다 하나니, 이는 여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여자들의 장래 신세에 대단히 간절함이라.

이에 이승만은 1914년 봄학기부터 한인중앙학원을 남녀공학제로 개편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홈에 다니고 있던 한인 여학생들을 한인중앙학원에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거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들로부터 의연금을 걷어 들여 여자기숙사를 확장하였습니다.

이후 이 여자기숙사 문제로 국민회, 그리고 감리교단과 갈등을 빚던 이승만은 1915년 4월경 한인중앙학원을 사임했습니다.

그는 한인의 학교는 한인의 힘으로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한인중앙학원의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1915년 가을 학기부터 한인여학원을 설립했습니다. 이승만이 여자학원을 설립했다는 것은 한인감리교회와의 결별을 의미함과 동시에 한인중앙학원의 폐교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이승만’ 첫 번째 시간으로 이승만과 한인중앙학원의 관계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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