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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최고 인기 행진곡 작사가' 줄리아 와드 하우


[인물 아메리카] '최고 인기 행진곡 작사가' 줄리아 와드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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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공화국 전투 찬가'를 작사한 줄리아 와드 하우에 관해 알아봅니다.

미국 남북 전쟁 중 북군의 공식 행진곡이 된 'Battle Hymn of Republic', 공화국 전투 찬가는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애창되는 전통 행진곡 중 하나입니다.

1861년 겨울, 수도 워싱턴 D.C.에는 수만명의 군인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군 병원은 부상병으로 가득찼고, 포토맥 강만 건너면 주가 다른 버지니아에서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북군 병사들을 만나 보려고 먼길을 찾아온 여류 작가이자 사회개혁 운동가이기도 한 줄리아 와드 하우는 여성은 불안하고 초조한 분위기 속에 호텔에서 지친 몸으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에 어른거리는 지친 군인들이 모습과 부상자들의 아우성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습니다. 약간 잠이 들어 있을 때도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병사들은 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는 그녀도 알고 있는 행진곡이 있었습니다. 그 행진곡은 노예제 반대투쟁을 하다 숨진 존 브라운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신이 무덤에서 흙으로 변해갔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줄리아는 1819년 뉴욕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줄리아는 개혁 운동가이며 시각 장애자 교육 전문가인 새무엘 그리들리 하우와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결혼 후 보스톤에서 살았습니다. 줄리아는 다섯 자녀를 키우면서도 여러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줄리아 와드 하우
줄리아 와드 하우

줄리아와 새무엘은 미국의 노예제 폐지를 위해 함께 싸웠습니다. 이들은 ‘커먼웰즈’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했습니다. 줄리아는 존 브라운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다 같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줄리아는 브라운 처럼 폭력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1859년 존 브라운은 오늘날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하퍼스페리라는 곳에서 노예 폐지를 위한 무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브라운은 그곳에 있는 무기공장과 군수품 창고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운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브라운은 체포돼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한편 남부에서는 존 브라운이 영웅이 됐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노래로 전파됐습니다. 병사들이 가장 좋아 하는 노래도 이 노래였습니다. 줄리아 와드 하우도 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운을 묘사한 가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의 호텔 방에 누워 시름을 하고 있던 줄리아의 머릿 속에 갑자기 병사들의 행진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어 새로운 가사로 쓰일 어휘들이 떠올랐습니다.

“머릿 속에서 시의 구절이 저절로 떠오르자 나 자신도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 떠오를 때까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 다음에는 벌떡 일어났다. 즉시 정리하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가 사라질까봐 서둘러 종이와 펜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시를 써 내려갔다.”

'주님께서 재림하는 영광 내눈에 보이네

재어 두신 분노의 포도 짓밟으며 오시네

공포의 검 휘두르며 운명의 번개 내리시노라

주님의 진리가 오나니'

"나는 마지막 절까지 써 내려갔다. 그제서야 다시 다시 자리에 누어 잠이 들었다."

당시 미국의 저명한 월간 잡지인 The Atlantic Monthly는 하우 여인이 쓴 시를 4달러에 샀습니다. 그리고 1862년 이 시를 잡지에 실었습니다. 하우의 시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훌륭한 행진곡에 딱 어울리는 어휘들이었습니다. Union Army, 즉 북군 병사들은 이 시를 가사로 붙여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새로운 가사를 붙인 이 곡은 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 즉 공화국 전투 찬가라는 의미의 공식 행진곡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줄리아 와드 하우는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에이브래엄 링컨 대통령도 그녀를 백악관에 초대했습니다.

백안관 만찬이 끝나고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우울해졌습니다. 북군은 그동안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우 여사와 링컨 대통령도 같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던 링컨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1865년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때부터 줄리아 와드 하우는 사회개혁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하우는 참정권을 비롯한 남녀 동등권 운동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1868년에는 뉴잉글랜드 여성 클럽을 설립하고 교육과 경제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서도 투쟁했습니다. 하우는 30년 이상 이 클럽의 회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줄리아 와드 하우는 평화운동에도 가담했습니다. 1870년 그녀는 “세계 여성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각종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국제 여성 총회를 열자고 촉구했습니다.

그 다음해 하우는 국제 여성 평화협회를 설립하고 그 회장이 됐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그녀는 계속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슈들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강연을 다녔습니다.

그러는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나와 그녀의 시 낭송을 들었습니다.

줄리아 와드 하우는 1910년 9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은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통적 행진곡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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