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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9) '한국 해방정국 활동'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9) '한국 해방정국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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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서재필 마지막 시간으로 한국 해방 정국에서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마지막 시간으로 한국 해방 정국에서의 서재필의 활동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서재필은 일찍부터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해인 1941년 봄 의용보에 그는 ‘미국 국방운동에 우리 한인이 공헌할 바가 무엇인가’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미국 본토와 하와이 그 외 미국 영지에 사는 동포들에게 필자가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다만 미국을 칭찬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여서 각자 자기가 가진 재간대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나라에 사는 책임만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미국이 우리 민족을 도와주려는 성의를 발하게 하는 큰 힘이 되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라고 그 혜택으로 우리 민족이 완전히 해방되리라고 깊이 믿습니다.​

한편 서재필은 태평양전쟁 기간 이른바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는데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그러던 중 마침내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이듬해 초부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부는 재미 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대규모 대회를 계획하였습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간 열린 한인자유대회가 그것입니다. 이 대회는 주미외교위원부를 후원하는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하였는데, 서재필도 이 대회에 참석하여 한미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였습니다.”

서재필은 이 대회의 폐회 연설도 담당하게 됐는데요. 그는 여기서 참석자들에게 이 전쟁에 최선을 다해서 협력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는 이제 미국과 세계를 위해서 싸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우리 미국은 우리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며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이 전쟁에서 승전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천300만 한국 국민은 일본과 싸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50년간 여러분의 말에 의지해온 여러분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도와주십시오. 그것은 여러분과 한국과 세계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소련이, 그리고 남한에서는 미국이 진입해 군정을 실시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군정은 국내외에서 높은 신망을 받고 있는 서재필에게 귀국해 미군정 고문을 맏아달라고 요청했는데요, 이에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나는 이미 노령으로 아무 야심이 없다. 나는 지위도 원치 않고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국민 교육에 있다. 만일 진정으로 한국 사람들이 나를 원하고 내가 감으로써 나의 사랑하는 조국 국민을 자유와 독립과 번영으로 인도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

80세가 넘은 노인이었던 서재필은 마지막 조국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며 1947년 7월에 귀국했습니다. 서재필은 귀국한 후 한국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을 아울러 통일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만년의 서재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소장 사진)
만년의 서재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소장 사진)

특히 서재필은 귀국 후 방송을 통해 독립한 조국의 미래상을 제시하려 했다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서재필은 미군정의 초청을 받아 1947년 7월 미군정 최고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 자격으로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내한합니다. 8월 15일 해방 2주년 기념 연설을 하고 9월 12일부터 이듬해 8월 27일까지 매주 금요일 40차례에 걸쳐 방송 강연을 합니다. 강연의 주제는 국내외 시사적인 문제와 민주주의 원칙, 건강, 상식 등 국민의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방송 강연 주제는 ‘선량한 국민과 민주주의’였는데요. 다시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그는 여기서 독립되고 통일된 민주국가의 선량한 국민의 특권과 책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때까지 꿈꾸어 오던 나라의 정부 형태가 독립되고 통일된 민주국가, 민주 정부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모델이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고 행정, 입법, 사법이 분리된 미국이었습니다. 서재필은 이런 나라와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원칙을 이해하고 실천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재필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나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 짐작할 있을 것입니다. 한국을 민주화하는 것만이 한국 민족의 살길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 옛날에 내가독립신문 발간하고독립협회 조직하여 국민개혁 운동을 부르짖은 것도 최종 목적은 민주화에 있었습니다. 민주주의화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향유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재필의 방송 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직전에 한 것으로 보이는 ‘자유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연설인데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1. 우리는 민주주의 정신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2. 칼로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3. 독재는 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이어진다. 4. 우방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를 환영해야 한다. 5. 한국 정부의 구성은 다수 집단은 물론 소수 집단도 포함해야 한다. 6. 사상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7. 우리는 한국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8.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촉진하는 대외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 9. 부유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모두 현재의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 10.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등 열 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한국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됐습니다.

이 와중에 서재필을 남한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는데요. 서재필은 이를 거부하고 1948년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독립운동의 거두로서 풍운의 삶은 살다 간 서재필에 대해서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서재필은 독립협회 지도자였기 때문에 굉장히 유명했던 것이죠. 그리고 개화운동, 계몽운동, 독립운동에서 최고 원로로 존중받았고, 이런 것은 미주 한인들에게도 마친가지였습니다. 미주한인사에서 서재필의 위치는 모든 독립운동 세력들을 아우를 수 있는…품을 수 있는… 원로로서… 화해시킬 수 있는… 실질적으로 갈등이 있을 때마다 서재필이 그들을 타이르고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위치였거던요. 서재필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이 개별적으로 분열돼 활동하면서도 구심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수사원. 잘 아시다시피 원천을.. 물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해 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뭐가 잘못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서재필 박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더 나은 길을 택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서 서재필의 위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도 서재필이 한인 독립운동사에서 실천적인 대부였다고 평가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잘 알고 있듯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화, 개혁의 선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에서도 실천적인 대부였습니다. 쟁쟁한 독립운동의 양대 지도자였던 이승만과 안창호 등도 독립협회를 통해 길러낸 인물들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몸소 독립운동 일선에 뛰어들어서 활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재능과 물질 등을 모두 바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당파에도 들지 않고 민족의 단결… 독립운동계가 많이 분열돼 있었는데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삶을 살았습니다.”

김승태 소장은 또 서재필의 삶을 알아갈수록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서 느낀 것과는 다른 진한 감동을 받는다고 했는데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하는 실천적 사상가였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변함없는 그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마지막 시간으로 한국 해방 정국에서의 서재필의 활동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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