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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7) '워싱턴 군축회의'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7) '워싱턴 군축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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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서재필 일곱 번째 시간으로 워싱턴군축회의와 범태평양회의에서의 활약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일곱 번째 시간으로 워싱턴군축회의와 범태평양회의에서의 서재필의 활약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서재필과 미국인 친구들은 1919년 5월 15일 필라델피아 북서부 레딩시의 라자 극장에서 집회를 열고 이튿날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했습니다.

결성 당시 이사진은 서재필, 톰킨스 목사, 사회학자 밀러 교수, 그리고 베네딕트 기자 등 11명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본부 창설 이후 한국친우회는 인근 레딩시, 오하이오주의 포스토리아, 티핀, 리마, 콜럼버스, 맨스필드, 얼라이언스, 매리언, 그리고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에서 지회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1920년 10월에는 영국 런던에, 1921년에는 프랑스 파리에도 한국친우회 지회가 결성됐습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서재필이 한국친우회를 통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동시에 지도하면서 이를 연계시켜 미국인들에게 한국 상황을 알리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하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했습니다. 특히 각 지역에서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선전물을 보내 각 지역에도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도록 독려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 목사는 1921년 6월 28일 자로 주미일본대사 시데하라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의 독립이 일본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미-일간 친선에도 도움이 될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한국친우회를 통해 미국 안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데 주력하던 서재필에게 1921년 들어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바로 이해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국 주도의 군축 회의가 열리게 됐던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파리강화회의 이후에도 미국과 일본은 해군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군비 확장은 태평양에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고 이에 해군 군비를 축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여론에 따라 1921년 취임한 워런 하딩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군비 축소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하여 8월 영국, 일본, 이탈리아, 중국, 벨기에 등에 공식 초청장을 발송했고, 이해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극동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렸습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서재필이 이 워싱턴군축회의를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이를 이용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이때는 미국, 일본 사이에 조금씩 그… 뭐라고 할까요. 틈이 생긴다고 할까요. 일본의 야욕 같은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니까… 미국도 어쨌든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갖게 된 거예요. 서재필이 그런 계산을 한 겁니다. 과거에는 일본과의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외교활동이 잘 먹힐 수 없었지만, 이번은 좋은 기회다. 마침 서재필은 안타깝게 일찍 죽었지만, 29대 미국 대통령 하딩과 네트워크가 있었어요. 굉장히 좋은 기회죠. 이런 기회를 활용해서 외교를 통해서 어쨌든 조선 독립 문제를 이슈로라도 만든다는 거죠.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상원 의원들 몇 명을 접촉해서 미국 상원 의원들이 국회… 상원에서 조선 독립과 관련된 발언들을 많이 하게 하는데, 하지만, 아직까지 공적인 이슈는 안 되었죠.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공적인 이슈로 만들면… 서재필은 모험주의자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의 흐름을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에 어떤 정책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재필이 그 틈을 파고들어서 노력을 한 거였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워싱턴군축회의에 대한 모든 준비를 서재필이 책임자로 있는 구미위원부에 위임하는 국무회의 결의를 통보했습니다. 또한 임시의정원에서도 이 회의에 파송할 한국 대표로 이승만을, 부대표로 서재필을 임명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1921년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를 나서는 서재필(오른쪽)과 이승만. (이승만기념관 소장 사진)
1921년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를 나서는 서재필(오른쪽)과 이승만. (이승만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서재필이 워싱턴군축회의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 국내와도 연계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그래서 중간에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서재필은 이걸 공개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국내와도 연결을 해요. 이상재를 비롯한 국내 대표, 13도 대표, 각 단체 대표, 해가지고 180명이 서명한 하나의 큰 글이 만들어집니다. 마치 예전에 독립선언서가 그랬듯이… ‘한국 인민이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글’이라는 글을 만들어 가지고 서재필에게 보내는 거예요. 이것은 미국에 있는 조선인들이 제멋대로 한 거지 우리가 잘 다스리고 있는 조선인들이 한 것이 아니라고 일본이 얘기할 때 서재필은 이걸 당당히 보내는 거죠. 우리 국민이 전부 다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글을 대표를 통해서 보내왔다. 요런 장치를 가지고 대회 관계자들과 미국 정치계와 접촉을 해서 어쨌든 이슈로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직까지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워싱턴군축회의에서 한국 문제와 관련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워싱턴군축회의는 한국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은 채 1922년 2월 6일 폐막했습니다.

이후 서재필은 자신의 회사가 파산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서재필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필립제이슨 상회가 사양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1923년 무렵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필립제이슨 상회는 1924년 사원들을 감원하고 외곽 지역으로 이전하기도 했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서재필은 1922년 가을 이후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부에서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언론에 활발히 투고하여 민족의 과제를 제시하고 활발한 강연 활동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서재필이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유일한과 함께 유한주식회사를 세웠던 1925년 무렵 미국의 태평양연구소가 주최하는 범태평양회의가 그해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됩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김승태 소장은 이 회의가 태평양연안국가들의 제반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국제회의로 한국에서도 대표단이 참석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범태평양회의는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 필리핀, 인도, 중국 등 태평양 연안 국가의 저명한 재야인사들이 모여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제반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국제회의였습니다. 이 회의는 국내에도 알려져 YMCA 총무 신흥우가 이미 1925년 3월 초부터 준비하여 송진우, 김양수, 유억겸, 김종철 등과 함께 한인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서재필은 국민회와 시카고 한인 유학생들부터 이 회의에 한인대표 고문으로 참석해 줄 것을 요청받고 기꺼이 수락했는데요. 다시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해외동포들은 이 회의를 일본의 학정과 한국의 상황을 태평양 연안 국가 국민들에게 알릴 좋은 기회로 보고 국민회와 시카고 한인 유학생들이 서재필에게 이 회의에 한인대표단의 고문으로 참석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흔쾌히 승낙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인 대표의 발표를 응원하고 회원 자격을 문제 삼는 일본 대표들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오히려 신흥우가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범태평양회의 상임위원으로 당선됐으며 이 회의의 운영위원으로도 참여했습니다.”

서재필은 일본 대표들에 맞서 범태평양회의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7월 4일 서재필 박사는 이 회의에서 참석자들에게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제일 좋은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세 강국 사이에 있어 평화를 주장하며 종교 풍기로서 도를 전하는 나라이다. 한국이 처음으로 지남철, 철갑선 등 여러 가지를 발명하여 4천여 년의 문명이 당당하던 나라이다. 현재 세계에서 별로 대우치 아니하는 이유는 한국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여러분은 오늘부터 좀 알아주기를 바라며 우리 희망하는 옳은 목적을 동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귀가하는 길에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일주일간 그곳에 머물며 동포들의 성대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8월 5일 저녁에 안창호가 주재하고 그 지역 교민회와 국민회 회원 60여 명이 참석한 환영만찬회에서 그는 범태평양회의를 보고하고 다음과 같이 연설하여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낭독: 서재필] 사랑 중에 가장 사랑은 민족 사랑이요. 민족단체에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나는 다른 단체에 어디든지 속하지 않았지만은 민족단체에는 속하였소. 누구든지 나서서 뒤에 앉아서나 민족단체에 방해를 주는 사람은 우리 민족에게 역적이오. 민족이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나는 나오리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일곱 번째 시간으로 워싱턴군축회의와 범태평양회의에서의 서재필의 활약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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