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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6)  '대한공화국 통신부'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6)  '대한공화국 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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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서재필 여섯 번째 시간으로, 대한공화국 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만들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여섯 번째 시간으로 그가 대한공화국 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만들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19년 한국에서 발생한 3.1운동을 계기로 서재필은 여러 단체와 지역으로 나뉘어 성장한 재미 독립운동 단체들의 힘을 하나로 아우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미국 동부에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선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서재필(앞줄 가운데)과 독립협회 회원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
서재필(앞줄 가운데)과 독립협회 회원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국내 운동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 동포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한인연합대회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갈 여권 발급을 교섭하기 위해 워싱턴에 와 있던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3월 하순부터 이 대회를 준비했는데요. 그 결과, 미국 독립의 발상지인 필라델피아에서 리틀 극장을 빌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1차 한인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짧은 준비 기간과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사회로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미국 각 지방에서 모여든 한인 대표들과 학생들 약 150명이 참석했고 그 지방의 미국인 유지들 및 한국에 다녀온 선교사들도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는 한국 상황에 대한 강연과 지지 연설, 토론이 이어졌고 각종 결의문과 호소문, 청원서 등을 결의했습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제1차 한인대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외부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한목소리로 조선독립을 외쳐서 미국 사회와 언론에서 처음으로 조선 이슈를 관심을 갖도록 한 데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하와이와 미국 서부에 치우친 독립운동의 중심을 미국 동부 주류사회로 전진시키고 특히 독립운동의 후속 세대를 길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서재필은 대회의 민주적 운영방식을 몸소 선보여서 참석한 청년들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두 명의 지도자의 결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참여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지요."

한편 1차 한인대회를 통해 새로운 기구가 들어섭니다. 바로 대한공화국 통신부입니다.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둔 대한공화국 통신부는 1차 한인대회 이튿날인 4월 15일 서재필의 제안을 대한인국민회가 구체화한 것이었습니다.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대한공화국 통신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기본적으로 1차 한인대회의 결의를 통해서 형성된 한국 독립운동을 미국에 홍보하는 기관입니다. 안창호계의 대한인국민회가 적극 지원하기는 했지만, 어떤 당파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독립적인 홍보 기관이었습니다.”

홍보 기관이었던 대한공화국 통신부는 1919년 4월 22일 출범했고 서재필이 그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통신부 수장을 맡으면서 서재필은 이달 29일 미주 한인사회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북미와 하와이와 멕시코에 재류하는 동포에게 고하노라! 우리 국민의 생명이 터럭에 달린 이때에 누구든지 마땅히 나라를 구할 생각밖에는 두지 말지라. 이러한 맘을 가지고 나는 우리 국민의 대표자가 되어 우선 우리의 당하는 정황과 사실을 미국 공중에 알리어 세계의 앞에 내어놓는 일을 허락하였노라. 이번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대한자유대회의 청함을 인하여 대한공화국 통신부를 필라델리피아에 두고 우리 국민회에서 부탁한 외교의 시설을 아래와 같이 하기로 작정하였노라.

서재필은 통신부 책임자였지만, 공식적인 선전활동을 위한 여행 경비 외에는 정기적인 급여를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한공화국 통신부는 출범한 뒤 곧 다른 기구 산하 기관으로 재편되는데요. 한국 숙명여자대학교 이황직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몇 달 안 되어 1919년 8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표로서 한국통신부와 파리위원부를 통합하면서 서재필의 한국통신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산하 기관으로 개편됩니다.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계속 필라델피아 통신부 책임을 맡아 임시정부의 외교-홍보 활동을 주관했습니다.”

그런데 통신부와 구미위원부의 관계는 일정한 역할 분담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이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워싱턴에 설립했고, 필라델피아의 통신부는 미주 동포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외교와 선전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출판과 홍보 사업 외에 대한공화국 통신부의 또 다른 주요 사업은 친한파 미국인들을 결속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후원 단체를 결성하는 것이 있는데요. 이는 ‘한국친우회’ 출범으로 가시화됐습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1차 한인연합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서재필은 회의 둘째 날 논의되었던 미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친우회 조직 계획을 국민회 총회 측에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들을 위하여 동정과 도덕적 원조를 지원하는 백인 친구들을 등록할지니, 그리하면 미국 국민 가운데 장차 우리 조국의 자유를 회복하는 데 일하며 또 우리와 같이 일할 견고한 단체가 있어 질지라. 우리는 이제부터 마땅히 전력을 다하여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우리 외교를 진행하여, 일반 미국인의 동정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우리의 조직하는 미국인의 유력한 기관으로부터 자기 정부에게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찬조하라고 권고하게 할지라.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김승태 소장은 한국친우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성원하기 위해 종교계, 교육계, 실업계의 각 분야별 외국인 유력자들로 조직된 단체입니다. 이 단체의 조직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차 한인대회 둘째 날 논의되어 필라델피아에서부터 설립되었습니다.”

한국친우회의 설립 목적은 대략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다시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은 첫째, 기독교와 자유독립국가를 위해 고통당하고 있는 한국 민족들에게 미국민의 동정과 지원을 보낼 것. 둘째, 한국 민족이 지금까지 받아온 일제의 학정과 부당한 대우를 가능한 더 이상 재발되지 않도록 미국민의 도덕적인 영향력과 호의적인 조정을 다 할 것. 셋째, 한국에 관한 진실한 정보를 미국민들에게 알릴 것. 넷째, 세계 모든 민족과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증진시키며 하나님의 법이 온 세계에 수립되도록 도울 것이었습니다.”

서재필과 미국인 친구들은 1919년 5월 15일 필라델피아 북서부 레딩시의 라자 극장에서 집회를 열고 이튿날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했습니다. 결성 당시 이사진은 서재필, 톰킨스 목사, 사회학자 밀러 교수 베네딕트 기자 등 11명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본부 창설 이후 한국친우회는 인근 레딩시, 오하이오주의 포스토리아, 티핀, 리마, 콜럼버스, 맨스필드, 얼라이언스, 매리언, 그리고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에서 지회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1920년 10월에는 영국 런던에, 1921년에는 프랑스 파리에도 한국친우회 지회가 결성됐습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서재필이 한국친우회를 통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동시에 지도하면서 이를 연계시켜 미국인들에게 한국 상황을 알리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하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했습니다. 특히 각 지역에서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선전물을 보내 각 지역에도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도록 독려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 목사는 1921년 6월 28일 자로 주미일본대사 시데하라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의 독립이 일본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미-일간 친선에도 도움이 될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이 워싱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뉴욕, 파크빌 등 미국 각지는 물론 1920년 10월에는 영국 런던에, 그리고 1921년 5월 프랑스 파리에까지 한국친우회가 결성돼 활동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언론에 따르면 한국친우회 회원은 2만 5천 명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 서재필을 대표하는 활동으로 한국친우회가 자주 거론됐습니다.

그런데 1922년 서재필이 제이슨상회의 경영 악화 탓에 재미 독립운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되면서 한국친우회의 활동도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여섯 번째 시간으로 그가 대한공화국 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만들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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