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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5) '1차 한인대회'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5) '1차 한인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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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서재필 다섯 번째 시간으로 1차 한인대회를 개최하기까지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다섯 번째 시간으로 그가 영문잡지 '코리아리뷰'를 발간하고 1차 한인대회를 개최하기까지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연구원으로 몇 년을 보내던 서재필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서재필은 1904년 위스타연구소를 사직하고 자신이 다녔던 해리 힐맨 고등학교 1년 후배인 해럴드 디머와 함께 윌크스베리에서 인쇄 문구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서재필은 훗날 이 시기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내가 미국에 다시 돌아와 3년간이나 의학과 인연을 멀리하고 있었던 만큼 그 길에 낙후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대학 연구생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때 마침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학교 친구가 인쇄업을 경영하니 같이 해 보자고 하여 나는 그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소규모로 시작하였으나 점차로 업무가 확장되어 1919년까지 여러 해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상당히 큰 사업을 하였다.​

서재필은 10년 이상을 사업에만 전념했는데요.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일단 사업을 시작한 직접적 이유는 한창 의사 커리어를 쌓아야 할 30대 초 중반의 나이를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바친 까닭에 미국 귀환 이후에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까닭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황직 교수는 서재필이 사업에 전념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다만, 하필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당시 미국은 ‘도금시대’라고 불릴 만큼 경제성장이 활발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서재필에게는 본래 기업가 자질이 있었는데, 해리 힐맨 아카데미에서도 방학 때는 장사를 해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문화에서는 기업가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높게 평가하는데, 일단 사업을 시작한 서재필로서는 기업인으로서 성공하여 훗날 조선 독립에 기여할 경제적,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사업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서재필이 다시 조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 생각을 한 것은 1918년 말 무렵부터였습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서재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였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서재필의 독립운동 참여에 1차 세계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서재필은 그 원칙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미국 정치계와 시민사회계에 조선 독립의 당위를 홍보하여 그들의 여론을 움직이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쉽게도 미주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 사회의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미국인 대상의 홍보전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이미 조선에서 독립신문을 간행하면서 홍보전에서 성과를 거뒀고 이미 미국 동부 주류 사회에서 인맥을 쌓아온 서재필로서는 자신이 홍보 분야에서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맡고 있던 안창호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사정을 세계 여론에 호소할 수준 높은 영문잡지를 발행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김승태 소장은 서재필이 영문잡지 발행을 제안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서재필은 1914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필립제이슨회사라는 이름으로 단독으로 인쇄문구업을 운영하다가 1918년 12월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일본에 대항하여 한국 독립을 위한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에게 영문잡지의 발간을 제안했습니다.”

서재필은 안창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영문잡지의 발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는 아직 일인과 병력으로 싸울 수 없으며 또 물질력으로 싸울 수 없은즉, 오직 우리는 붓과 공의로 싸워 세계에 일본이 한국 백성에게 불공정한 행동하는 것과 한인이 어떠한 경우에 있는 것을 광포할 뿐이라. 이렇게 하는 것이 몇 가지 목적을 성취하리니. 첫째, 이 세계가 장차 한국의 사정을 알므로 이 세계 민족 가운데 공의와 정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한국의 친구들이 되어 한인으로 더불어 깊은 동정을 표하리며, 둘째 한인의 잡지가 일본의 한국 정책을 발간함이 일본으로 하여금 장차 한인을 잘 대우하겠다는 생각이 생기게 하리라.

그런데 서재필의 영문잡지 발간 제안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잡지 발간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재필의 노력으로 영문 잡지 ‘코리아리뷰’가 빛을 보게 되는데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이 제안은 1919년 1월 임시국민대회에 상정되었으나 동포들의 생활상황에 비추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부결되었습니다. 그러자 서재필은 자신의 사업장을 제공하고 7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것마저 임시위원회에서 거부하자 1919년 2월부터 한인 동포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얻어 영문잡지를 발간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미주에 알려지게 되자 4월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회’를 조직 개최하고 그 첫날 서재필의 제안으로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두기로 하여, 1919년 6월부터 그 기관지로 ‘코리아리뷰’를 발간하고 서재필이 총주필을 맡았습니다.”

1919년 3월 9일 안창호 앞으로 고국의 3.1운동을 알리는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신한민보’는 3월 13일 자 호외로 이를 교민 사회에 알렸습니다.

3.1운동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경을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살아있는 백성인 것을 알았고 이런 백성은 반드시 자유 독립을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연설도 하고 선전사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백성이 죽음을 불사하고 일제에 저항한 것은 나의 기쁨을 억제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포에 대한 자부심이 불이 일듯 하는 동시에 내가 독립신문을 통하여 민중 앞에 뿌린 자유 사랑의 씨가 싹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최선을 다하여 열매가 맺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계기로 여러 단체와 지역으로 나뉘어 성장한 재미 독립운동 단체들의 힘을 하나로 아우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미국 동부에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선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국내 운동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 동포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한인연합대회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1919년 1차 한인대회 참가자들 ('우리역사넷' 소장 사진)
1919년 1차 한인대회 참가자들 ('우리역사넷' 소장 사진)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갈 여권 발급을 교섭하기 위해 워싱턴에 와 있던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3월 하순부터 이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처음에는 뉴욕에서 큰 연회를 열고 각국 신문기자들을 초대하여 서재필과 이승만, 정한경 등이 한국 상황에 대해 연설하고 동정 여론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협의를 하는 도중 미국 독립의 발상지인 필라델피아에서 리틀 극장을 빌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여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 대회는 짧은 준비 기관과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사회로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미국 각 지방에서 모여든 한인 대표들과 학생들 약 150명이 참석했고 그 지방의 미국인 유지들 및 한국에 다녀온 선교사들도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는 한국 상황에 대한 강연과 지지 연설, 토론이 이어졌고 각종 결의문과 호소문, 청원서 등을 결의했습니다.

회의 마지막 날인 4월 16일 오후에는 서재필이 회의의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참석자들이 각자의 손에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일단의 말은 탄 군대와 악대가 그들의 선두를 이끌었습니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하자 서재필은 사람들을 미국 독립선언서와 헌법 서명이 이뤄진 곳으로 안내했고, 그곳 관장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어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고 다 함께 대한민국을 위한 만세삼창을 했습니다. 이어 줄을 지어 ‘자유의 종’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지나가는 것으로 전체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제1차 한인대회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외부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한목소리로 조선독립을 외쳐서 미국 사회와 언론에서 처음으로 조선 이슈를 관심을 갖도록 한 데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하와이와 미국 서부에 치우친 독립운동의 중심을 미국 동부 주류사회로 전진시키고 특히 독립운동의 후속 세대를 길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서재필은 대회의 민주적 운영방식을 몸소 선보여서 참석한 청년들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두 명의 지도자의 결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참여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지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다섯 번째 시간으로 그가 영문잡지 ‘코리아리뷰’를 발간하고 1차 한인대회를 개최하기까지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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