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4) '귀국 활동 후 재정착'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4) '귀국 활동 후 재정착'
please wait

No media source currently available

0:00 0:10:35 0:00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서재필 네 번째 시간으로, 조선에 1차 귀국해서 활동한 뒤 다시 미국에 돌아와 재정착하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네 번째 시간으로 그가 1차로 조선에 귀국해서 활동한 뒤 다시 미국에 돌아와 재정착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서재필은 1892년 콜럼비안대학교에서 의학사(M.D.)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이로써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서양 의학을 전공한 졸업생이 됐습니다.

이후 1년간 서재필은 인근 가필드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고 마침내 1893년 정식 의사 면허를 얻었습니다.

당시 서재필은 가필드병원에서 근무했고 동시에 콜럼비안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실은 서재필의 결혼 사실을 알리는 신문자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낭독: 신문기사] 워싱턴 D.C.의 제임스 화이트 대위 부부가 막내딸 뮤리엘 조세핀 암스트롱 양의 결혼식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신랑은 의사 필립 제이슨으로 워싱턴의 저명한 의사이자 워싱턴 소재 의과대학에서 현미경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워싱턴의 의사라는 기사 내용대로 서재필은 당시 워싱턴의 가필드병원 소속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약 9개월 뒤 지역 신문에서 가필드병원의 현황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거기에 서재필의 상세한 직무가 나왔습니다.

[낭독: 신문기사] ‘병리학∙세균학 실험실’은 완전한 장비를 갖추었고 완전한 과학적 임상적 조사를 위한 모든 현대적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의사 필립 제이슨이 실험실 책임자였고, 과학적, 임상적 조사 활동은 그의 감독하에 진행된다.

그 무렵 서재필에게 운명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앞서 서재필의 결혼식 기사에 실렸던 여인 뮤리엘 암스트롱입니다.

그녀와 서재필이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재필이 묵던 워싱턴의 호텔에 뮤리엘의 가족이 묵게 되면서 그녀와 알게 되었다는 아주 간단한 회고만 전합니다.

이들의 결혼식은 1894년 6월 20일에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당시 이들의 결혼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낭독: 신문기사] 결혼식은 워싱턴의 커비넌트 교회에서 수요일에 거행될 예정이며 결혼식이 끝나면 화이트 대위의 저택에서 피로연이 이어집니다. 제이슨 부부는 7월 20일 이후 노스웨스트 14번가 916번지의 자택으로 돌아옵니다. 신부는 미국 철도우편사업을 창안한 조지 암스트롱 대령의 막내딸입니다.​

그런데 서재필이 의사가 되고 가정을 꾸릴 당시 조선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일본이 내세운 조선의 개혁파 정권이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길에 올랐던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 인물들을 귀국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자문 역할을 부탁받은 서재필은 마침내1895년 12월 25일 조국을 떠난 지 11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서재필은 조선에 있는 동안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교육과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특히 세종대왕이 창안한 한국의 알파벳 시스템인 한글의 가치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896년 ‘독립신문’이라는 최초의 한글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조선에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1897년 독립회관과 독립문을 건설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독립신문이 비판적 기능을 하고 독립협회 토론회가 거듭되면서 친러시아파 정부와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자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측은 독립협회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서재필이 사주하기 때문이라고 서재필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고, 서재필은 결국 1898년 5월 조선을 떠났습니다.

서재필은 부인 뮤리엘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미국은 쿠바 문제로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쿠바로 파병된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 황열병이 유행하면서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미군은 월터 리드 박사를 대책위원장으로 하여 군의관들을 쿠바에 파송했습니다. 당시 그는 제자인 서재필을 찾았지만, 그를 찾지 못하고 쿠바로 향했습니다.

한편 서재필이 워싱턴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았지만, 리드의 부대에 들어가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도 서재필은 미국 군의관으로 자원해 쿠바에서 실려 오는 부상병들을 치료했습니다.

서재필은 군 복무를 끝내고 다시 병원 개업을 위해 준비하던 중 펜실베이니아대학 부속인 ‘위스타해부학∙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초청받고 그곳에 취직했습니다.

연구원으로 몇 년을 보내던 서재필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04년 위스타연구소를 사직하고 자신이 다녔던 해리 힐맨 고등학교 1년 후배인 해럴드 디머와 함께 윌크스베리에서 인쇄 문구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업은 성공적이어서 이듬해인 1905년 필라델피아 분점을 내고 필라델피아시 인명록 겸 상공록에 수록될 정도로 성공했습니다.

서재필도 훗날 이 시기의 일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내가 미국에 다시 돌아와 3년간이나 의학과 인연을 멀리하고 있었던 만큼 그 길에 낙후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대학 연구생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때 마침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학교 친구가 인쇄업을 경영하니 같이 해 보자고 하여 나는 그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소규모로 시작하였으나 점차로 업무가 확장되어 1919년까지 여러 해 동안 필라델피아에서 상당히 큰 사업을 하였다.

서재필은 무려 14년 동안 사업에만 전념했는데요.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의 이황직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일단 사업을 시작한 직접적 이유는 한창 의사 커리어를 쌓아야 할 30대 초 중반의 나이를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바친 까닭에 미국 귀환 이후에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까닭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황직 교수는 서재필이 사업에 전념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다만, 하필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당시 미국은 ‘도금시대’라고 불릴 만큼 경제성장이 활발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서재필에게는 본래 기업가 자질이 있었는데, 해리 힐맨 아카데미에서도 방학 때는 장사를 해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문화에서는 기업가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높게 평가하는데, 일단 사업을 시작한 서재필로서는 기업인으로서 성공하여 훗날 조선 독립에 기여할 경제적,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사업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가 발행한 월간 ‘대도’ 창간호에 실린 그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낭독: 서재필] 세계 문명국인이 힘써 실행코자 하는 희망이 여러 가지가 있으니. 1은 종교나 도덕을 발달케 함이오. 2는 지식을 배양코자 함이오. 3은 신체를 강장케 함이오. 4는 물질적 재산을 적치코자 함이오. 5는 정부를 완전하게 조직하여 온갖 동포가 보호를 잘 받아 무슨 압제 속에든지 들어가지 않게 하고자 함이라. 문명국인은 오늘에도 이 몇 가지 목적을 위해야 열심 경쟁함이 저의 조상이 백 년 전에 경쟁한 것과 같이하니 그의 수고하는 결과로 오늘날 구미 각국에 있는 몇백만 명 남녀가 행복을 누리는지라. 이 세상 어디서든지 어떤 사람의 자손이든지 막론하고 받을 만하게 된 사람은 도와주려고 예비하고 있는 이가 많을뿐더러 그러한 남녀는 부하고 강한 나라 국민이 가는 곳마다 공경을 받느니라.

한편 성공한 기업으로 인정받은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기업인의 모임인 상공회의소에서 회계를 맡아 보며 인맥을 쌓고 지역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시장 토마스 스미스, 법조인 밴 로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트리니티 교회 목사인 플로이드 탐킨스 등은 서재필의 친구로서 얼마 후 서재필이 미주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기간 사업에 전념한 서재필이 조국의 현실에 전혀 무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재필은 1905년 자신을 찾아온 이승만과 윤병구를 도와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낼 청원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면서 미한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네 번째 시간으로 그가 1차로 대한제국에 귀국해서 활동한 뒤 다시 미국에 돌아와 재정착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