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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3) '의학 선택과 결혼'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3) '의학 선택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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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서재필 세 번째 시간으로,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고 결혼하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세 번째 시간으로 그가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고 결혼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서재필은 4년제 고등학교를 3년 만에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 서재필의 진로에 다시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서재필은 홀렌백의 지원을 받아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라파예트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홀렌백은 서재필이 조선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했고, 그가 이를 거절하자 서재필의 대학 진학 후원을 중단했던 것입니다.

이제 서재필은 다시 홀로 서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데이비스라는 워싱턴 D.C. 소재 대학 영문학 교수가 친구인 스콧 교장을 찾아 윌크스베리에 들렀던 것입니다.

스콧 교장은 그에게 서재필의 상황을 소개했고, 데이비스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학예관인 오티스 메이슨 앞으로 서재필에 대한 소개장을 써줬던 것입니다.

소개장으로 가지고 워싱턴으로 간 서재필은 스미스소니언에서 임시직으로 미술품 감정과 정리 작업을 맡았습니다. 이후 메이슨은 서재필을 미 육군 군의감 산하 의학도서관 관정인 존 쇼 빌링스에게 소개했고, 빌링스는 서재필을 의학도서관의 정식 사서로 고용했습니다.

의학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서재필은 동양 의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책의 중요 내용을 요약하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서재필은 이렇게 의학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가 생겼는데요. 바로 의학입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자대학교 이황직 교수는 의학이 서재필에게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처음에 의학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대학 합격증을 받고도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한 청년이 미국 육군 군의감 산하 의학도서관에서 한문으로 된 동양 의학 서적 색인 작업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의학에 관심을 가졌고, 의사가 될 길을 열었습니다. 그때까지 의학은 고학생 서재필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서재필은 막연한 꿈이었던 의학 연구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빌링스 관장은 서재필에게 먼저 야간 대학에 다니면서 의과 대학 입학 자격을 갖출 것을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1888년 가을부터 콜럼비안대학교 야간부 과정인 코코란과학학교에 입학해 1년간 다녔고, 마침내 1889년 가을 워싱턴 소재 콜럼비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이 시기에 서재필은 의과대학 수업 외에도 실력을 키워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로 미국 병리학의 창시자인 조지 스턴버그 박사와 육군 군의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월터 리드와 만났던 것입니다.

스턴버그 박사는 의학도서관에서 근무하던 서재필을 의학박물관 부설 병리학 실험실장인 리드 소령에게 실험조교로 쓰도록 했습니다. 리드 소령과 함께 서재필은 당시 최신 실험 방법을 익히며 의학 연구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한국 숙명여대 이황직 교수는 이를 통해 서재필이 세균학과 공중보건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서재필은 의학 가운데 당시 첨단 학문이었던 세균학과 공중보건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첫 귀국 활동 시기 그러니까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활동기에 당시 조선의 위생 문제를 개선하려는 데 노력했습니다. 1926년 이후 다시 의학에 복귀해서도 이 분야에 전념했고 다시 해방 이후 1947년 귀국 적십자협회와 대한의학협회와 힘을 합쳐 국민 보건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시 말해 서재필에게 의학은 ‘과학적 합리성을 통해 시민의 삶을 개선하려는 계몽적 시도의 일환’이었습니다.”

서재필은 3년간 오전에는 대학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의학도서관과 박물관에서 일했습니다. 훗날 서재필은 당시 대학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의과대학 생활은 매우 재미있었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돌아와 사무를 보았다. 법률을 배우려다가 의술을 배우게 되어 처음에는 마음에 불만이 좀 없지 않았으나 강의를 들어가는 동안에 차츰 재미가 나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령 눈을 배울 때는 ‘눈이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제목으로부터 눈의 위치, 사명, 동작, 병의 종류, 치료 방법, 수술 여부에 이르기까지 그것 한 가지를 완전히 마쳐놓은 후에 다시 다른 기관, 즉 입이라든가 귀라든가 대해서도 역시 그런 순서를 배워가게 되니 여간 재미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학생으로 선생의 강의만 듣지 아니하고 혼자 연구도 하였는지라, 그것도 과연 선생의 의견과 맞는가 아닌가를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선생의 강의 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서재필은 1892년 3월 17일 콜럼비안대학교에서 의학사 학위(M.D.)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이로써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서양 의학을 전공한 졸업생이 되었고, 콜럼비안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졸업생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후 1년간 서재필은 인근 가필드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고 마침내 1893년 4월 정식 의사 면허를 얻었습니다.

이후 1894년 서재필은 의학도서관과 박물관의 공직을 사임합니다.

당시 서재필은 가필드병원에서 근무했고 동시에 콜럼비안대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실은 서재필의 결혼 사실을 알리는 신문자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낭독: 신문기사] 워싱턴 D.C.의 제임스 화이트 대위 부부가 막내딸 뮤리엘 조세핀 암스트롱 양의 결혼식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신랑은 의사 필립 제이슨으로 워싱턴의 저명한 의사이자 워싱턴 소재 의과대학에서 현미경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워싱턴의 의사라는 기사 내용대로 서재필은 당시 워싱턴의 가필드병원 소속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약 9개월 뒤 지역 신문에서 가필드병원의 현황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거기에 서재필의 상세한 직무가 나왔습니다.

[낭독: 신문기사] ​'병리학-세균학 실험실'은 완전한 장비를 갖추었고 완전한 과학적 임상적 조사를 위한 모든 현대적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의사 필립 제이슨이 실험실 책임자였고, 과학적 임상적 조사 활동은 그의 감독하에 진행된다.

이 기사로 근거로 서재필이 당시 워싱턴 D.C.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었던 가필드병원의 병리학-세균학 실험실 책임자로 근무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재필은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방학 기간을 이용해 윌크스베리의 루전카운티 법원에서 귀화 자격 심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시민권 신청 서류에 기재한 서재필의 영문 이름은 ‘필립 제이슨’이었습니다.

그 무렵 서재필에게 운명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앞서 서재필의 결혼식 기사에 실련던 여인 뮤리엘 암스트롱입니다.

그녀와 서재필이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재필이 묵던 워싱턴의 호텔에 뮤리엘의 가족이 묵게 되면서 그녀와 알게 되었다는 아주 간단한 회고만 전합니다.

이들의 결혼식은 1894년 6월 20일에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당시 이들의 결혼식을 알리는 신문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낭독: 신문기사] 결혼식은 워싱턴의 커비넌트 교회에서 수요일에 거행될 예정이며 결혼식이 끝나면 화이트 대위의 저택에서 피로연이 이어집니다. 제이슨 부부는 7월 20일 이후 노스웨스트 14번가 916번지의 자택으로 돌아옵니다. 신부는 미국 철도우편사업 창설자인 조지 암스트롱 대령의 막내딸입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세 번째 시간으로 그가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고 결혼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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