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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2) '정착 과정'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선구적 업적 서재필 (2) '정착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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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두 번째 시간으로, 미국 정착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두 번째 시간으로 그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884년 개화파의 단독 쿠데타였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그리고 서재필 등은 일본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들을 태운 배는 1884년 12월 13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이어 서재필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도착했지만, 일본은 이들을 박대했습니다.

서재필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가 몇 번 죽을 뻔하고 도쿄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은 돈도 없고, 숙소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천대했고, 때로는 실제로 적대감을 가지고 대했다. 나는 몇 달 동안 일본에 있던 동안 겪었던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때로는 이틀 동안 굶기도 했고 때로는 유숙할 곳이 없기도 했다. 요코하마에 있던 한두 사람의 미국인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거나 얼어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요코하마에 있던 미국인 한두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것은 미국성서공회 일본 지부 총무로 그곳에서 활동하던 헨리 루미스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머물며 준비하던 미국 선교사들이었습니다.

특히 루미스는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서재필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편 루미스와 김옥균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서재필은 루미스 집에 들어가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고 그로부터 영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일본에서 그런 식으로 숨어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서광범과 의논하여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이를 동지들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박영효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지만, 김옥균은 일본에 남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여비를 마련하고 루미스와 선교사들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고 서재필 일행은 마침내 미국행 배를 타게 됐습니다.

서재필과 서광범, 그리고 박영효 일행은 1885년 6월 11일 드디어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서재필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는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으며 이 나라 풍습에도 익숙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생소한 곳에서 우리는 온갖 고초를 맞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귀족이던 박영효 씨나 불과 1년 전까지 워싱턴 우리 공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서광범 씨의 지위를 알아보는 이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아무 명목 없는 나인지라, 나 자신을 남이 몰라준다고 물론 낙심하지 아니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거친 파도에 밀려서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한 쓰레기처럼 외롭고 가엾어 보이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가지고 간 선교사들의 소개장을 가지고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여러 주일 동안 마음의 고통과 물질의 궁핍을 겪다가 끝내 세 사람은 같이 지내기가 곤란하여 따로 떨어져 지내기로 했습니다.

박영효는 자신의 높은 지위에 무관심한 미국에 머물기보다는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닫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서광범은 조선에 제일 처음으로 파견된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 형의 도움으로 뉴저지주의 럿거스대학으로 가게 됐습니다.

이에 서재필은 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기로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홀로 남은 서재필은 어떤 일자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쉬운 일이었다고 회고하는 일은 일당 2달러에 가구점 광고지를 집마다 배부하는 것이었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나는 1년 아니면 그 이상을 샌프란시스코에 홀로 남겨져 있었고, 그 시기의 대부분을 생계를 위해 일했다. 가장 좋은 일자리는 그 도시의 주거 지역에 있는 문 앞에 가구점의 광고 전단을 배부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언어 능력이나 영업 수완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와 발만 있으면 되었고, 그 까닭에 하루에 10마일(16km)가량을 걸어야만 했다. 일당은 2달러였고, 주일마다 5일과 반나절을 일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영어를 배우러 YMCA 학교에 다녔다.

이런 서재필의 육체노동은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재필 연구가인 한국 숙명여대의 이황직 교수는 미국에서의 노동 경험을 통해 서재필이 많은 것을 배웠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이황직 교수​]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스물한 살의 청년, 영어를 못 하는 이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막노동뿐이었습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동은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은 오직 생존을 위해서 명문가 출신의 자존감을 버립니다. 그런데 노동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재필은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자립이야말로 자유민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의 자유가 그들의 종교인 개신교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렇게 이렇게 1년간 주경야독의 시간을 보내던 서재필에게 조력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동부에서 온 58세의 신사 존 웰스 홀렌백이었습니다. 동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광업으로 부를 축적한 홀렌백은 여름 휴가차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가 서재필이 다니던 교회의 제임스 로버츠 장로의 소개로 서재필을 만났습니다.

서재필이 마음에 들었던 홀렌백은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탄광이 있는 ‘윌크스베리’로 데려가서 공부를 시키기로 했습니다.

이에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백이 이사로 등재된 사립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홀렌백과 학교 교장에게서 미국에 귀화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조선을 배신하는 행위처럼 느껴져 결정을 미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마치고 언젠가 조국에 돌아가 봉사하려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안전하고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하고 1890년 6월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습니다.

서재필은 1889년 6월 4년제 고등학교를 3년 만에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 서재필의 진로에 다시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서재필은 홀렌백의 지원을 받아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라파예트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홀렌백은 서재필이 조선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했고, 그가 이를 거절하자 서재필의 대학 진학 후원을 중단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단절된 서재필은 힐맨 고등학교의 에드윈 스콧 교장의 집에 한때 기거했습니다. 그런데 서재필은 이곳에서 그의 인생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을 만났는데요. 바로 법조인 출신었던 스콧 교장의 장인이었습니다.

존경받는 법조계 출신의 노인에게서 서재필은 미국 민주 정치의 원리뿐만 아니라 실제 작동 과정과 관행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학습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만남에 대해 서재필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나는 학교의 교장 댁에서 기숙하였는데 역시 집에 같이 살고 있던 교장의 장인으로부터 미국 생활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특전을 누렸었다. 그는 퇴직 법관으로 주와 중앙 입법부에서 다년간 봉사한 분이었다. 그는 밤마다 입법과 법정에서의 여러 가지 경험을 말해주었는데, 미국 생활과 제도를 알기에 목마른 나에게는 유익하기만 아니라 재미만으로도 견줄 데가 없었다.

이제 서재필은 다시 홀로 서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데이비스라는 워싱턴 DC 소재 대학 영문학 교수가 친구인 스콧 교장을 찾아 윌크스베리에 들렀던 것입니다.

스콧 교장은 그에게 서재필의 상황을 소개했고, 데이비스 씨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학예관인 오티스 메이슨 앞으로 서재필에 대한 소개장을 써줬던 것입니다.

소개장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간 서재필은 스미스소니언에서 임시직으로 미술품 감정과 정리 작업을 맡았습니다. 이후 메이슨은 서재필을 미 육군 군의감 산하 의학도서관 관정인 존 쇼 빌링스에게 소개했고, 빌링스는 서재필을 의학도서관의 정식 사서로 고용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두 번째 시간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이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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