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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1세대 이민자 안재창 (6) '역사적 의미'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1세대 이민자 안재창 (6)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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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가는 첫 번째 이민선에 올랐던 안재창 마지막 시간으로, 독립운동 지원과 그의 인생이 한인 이민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가는 첫 번째 이민선에 올랐던 안재창 마지막 시간으로 안재창의 독립운동 지원과 그의 인생이 한인 이민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미국 본토 대평원 지역에서 농장을 경영해 성공한 안재창은 디트로이트에 옮겨가 중국 음식 제조업에 투신했습니다.

안채창은 동업자들과 ‘정안회사’를 설립해 한때 크게 성공했습니다. 당시 안재창이 만든 정안회사는 나름 눈에 띄는 방식으로 운영됐는데요.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런 운영 방식이 정안회사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정안회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원활한 소비자와의 소통이었는데, 첫째는 배달하는 직원이 소비자에게 지난번 배달한 음식에 대해 알아보게 하고 동시에 새로 개발한 음식을 소개하여 주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장 조사와 메뉴 개발을 끊임없이 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중국 음식 도매업이 필생의 사업으로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각자의 전문적인 기능을 갖췄던 것입니다. 셋째는 1910년대 네브래스카에서부터 가까운 친척같이 쌓인 끈끈한 인연으로 안채창은 경험이 많은 어른으로, 젊은 정양필과 정양홍은 집안 조카로 유창한 영어로 경영과 홍보를 맞아 성심껏 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안회사의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929년 미국을 덮친 경제대공황으로 디트로이트 경제가 타격을 받으면서 찹수이 도매업에 나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후 정안회사는 찹수이 도매업보다는 소매업에 집중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는데요.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친 뒤 결국 1951년 4월 해체 신고를 하고 회사 시설과 고객 계정을 매각했습니다.

안재창은 이후 정오리엔탈푸드 등 다른 중국음식 판매 업체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은퇴 생활을 하다가 1963년 아흔 살 생일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재창은 평생 사업에 종사했지만, 이승만과 박용만 등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거물들과도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승만과 박용만은 안재창에게 선생님과 같은 존재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안재창에게 박용만이나 이승만은 최고 학부를 졸업한 카리스마가 있는 독립투사들이었고, 선견지명이 있는 선생님들이었던 것입니다.”

안재창은 특히 이승만을 일생 내내 지지했는데요.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안재창이 이승만을 극진하게 대접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안재창과 이승만의 관계는 이승만이 1912년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 한인소년병학교 졸업생들을 축하 연설을 하러 방문했을 때부터 안면이 있었고, 1920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코리아농척회사를 할 때 이승만이 정양경과 함께 찾아와 한국친구회 지부를 세우고 후원금을 모집할 때였습니다. 그 후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하고 미국 동부를 방문할 때 디트로이트에 들르면 안재창은 그를 독립투쟁하는 지도자 선생님으로 모시고 소식도 듣고 극진히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한 예로 이승만이 헌 손가방을 들고 헌 양복을 입고 나타나자, 그를 모시고 이탈리아인이 경영하는 양복점으로 가서 양복 1벌과 구두를 맞춰 주었던 것입니다. 이승만을 미국 동부를 방문할 때 으레 디트로이트를 들르고 안재창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박용만도 안재창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안재창은 네브래스카 링컨에서 박용만을 만나고 박용만이 투자한 농장에 합자해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박용만에게서 농장을 소유하게 되는 절차를 배웠고, 한인 소년병학교 출신이며 네브래스카 농과대학 졸업생인 정양필과 한시호에게 과학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배웠으며 그들과 동업자가 되어 주식회사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안재창은 또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를 지지하고 학교 생도들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안재창은 지역사회 지도자로 카리스마가 있는 개화기 독립협회 소장파였던 박용만을 지도자로 섬기고 성원했고, 그가 하와이로 떠난 뒤에는 이승만을 후원했습니다.

이렇게 안재창은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부터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는데요.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는 ‘자기실현’의 수단이었다고 강조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안재창은 19세기에 몰락한 사대부의 사람으로 한학을 공부한 유교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조상이 살아온 조국이 있고, 조국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은 사람마다 마땅히 할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은 이해타산을 따지고 계산을 해서 하는 일이 이유가 아니라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부모를 잃었다는 것과 같은 망극지통이었고 그것은 그지없이 슬프고 또한 창피한 것이었습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한인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재미 한인들은 가슴에 새겨진 망국지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유색인종으로 차별대우를 받는 미국에서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워 ‘대국 진출’을 실현하고 귀국하여 근대화에 기여한다는 것이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은 자기실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안재창이 살았던 초기 재미 한인사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먼저 자주독립과 반일정신이라는 확고부동한 정치적 이념을 들었는데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첫째로는 초기 한인 사회 이민자들은 조국이 멸망하여 일본 식민지가 되어 그들을 보호해줄 대사관, 영사관이 없어 한인들끼리 모여 상부상조하는 지역사회를 조직하고 지역단체를 만들어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한인들은 농촌에 살았고, 지역사회는 한인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초기 한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다녀서 좀처럼 안정된 지역사회가 조성되기는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와 유타, 네브래스카, 콜로라도, 일리노이 등 미국 대륙 농촌에 띄엄띄엄 흩어져 지역 사회를 만들어 살았고, 그것을 연결하여 집단적인 목표인 독립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자아의식과 자부심을 길러주기 위해 국어 학교를 만들어 국어를 가르치고 자기들이 원하는 독립운동과 근대화에 이바지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다음 재미 한인사회의 특징으로는 이들 사회가 지도자 중심 사회였다는 점입니다. 재미 한인사회는 분열돼 있다가도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고 안형주 씨는 설명했습니다.

그밖에 초기 재미 한인 사회는 조국의 발전에도 헌신하려 했다고 안형주 씨는 지적했습니다.

안재창이 세상을 떠난 지도 60여 년이 다 돼 가지만, 그가 초기 한인 이민사에 남긴 흔적은 여전히 되새겨볼 만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그는 모범 이민자 농부였습니다. 그는 미국에 가서 육체노동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가난을 면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인 지역 사회를 조직하고 상부상조하는 지역 한인사회를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오직 자기 운명과 부지런함 그리고 사리를 잘 따져 옳은 판단을 하고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사업은 항상 변하며 사업의 흥망성쇠는 무상하고 미국 사람들이 새것을 선호하여 새로운 사업이 늘 생기고 소수민족에게도 기회가 온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안재창’ 마지막 편으로 안재창의 독립운동 지원과 그의 인생이 한인 이민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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