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가는 첫 번째 이민선에 올랐던 안재창 다섯 번째 시간으로 안재창이 만든 중국 음식 도매업체인 정안회사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조선 제물포항을 출발한 첫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들어온 안재창은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에 들어간 뒤 대평원 지역에서 농업에 투신했습니다.
안재창은 네브래스카주 링컨에서 농장을 임차 경영하고 콜로라도주에서 농장을 직접 구입해 한인농업주식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는 콜로라도주 웰드카운티의 한적한 캘러턴 그릴리 설탕회사의 사탕무 찌꺼기를 버리는 폐기장 옆구리의 싸구려 땅을 매입했습니다. 한인농업주식회사는 이런 외딴곳에 농토를 사서 토지를 개간하고 미국 사람들이 많이 먹는 양배추, 상추, 호박, 오이, 당근 등을 재배하여 인근 작은 도시에 팔았습니다.
한인농업주식회사에서 안재창은 미국 이민 후 처음으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한인농업주식회사는 재미 한인이 세운 주식회사로는 처음으로 1918년에 결산보고를 하고 이윤을 주주들에게 분배한 뒤에 해산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신한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낭독: 신한민보 기사] 네브래스카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몇 해 전에 농사주식회사를 조직하고 자본금을 모집하여 콜로라도 캘러턴에 토지를 사서 몇 해 동안 큰 이익을 얻었으므로 장차 그 회사의 사업을 일층 더 확장하기 위하여 그 토지를 팔아 이익금을 나누어 가지고 다시 더 좋은 실업을 경영할 터이라 하더라.
한편 안재창은 한인농업주식회사를 해산한 뒤 다섯 번째 모험에 나서는데요. 한인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의 설명입니다.
[녹취: 안형주 씨] “농지를 개간한 경험을 얻은 안재창은 다섯 번째 모험인 농지개간회사 ‘코리안 농척회사’를 1920년에 세우고 네브래스카에서 알게 된 한인들과 합자하여 콜로라도주 덴버시 외곽에 2만 달러를 주고 미개간지를 구입하여 나무와 바위를 제거하고 진입도로와 농도를 만들어 수리시설도 넣어서 농장을 만들어 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재창의 이 시도는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요. 그래서 안재창은 코리안 농척회사를 떠나 여섯 번째 모험에 나서게 됐다고 한인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그러나 토지 구입 과정에서 과잉 투자로 운영 자금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카고의 한 동포가 수천 달러를 투자하여 코리안 농척회사는 곤경을 면할 수 있었고, 안재창은 네브래스카 농과 대학을 졸업한 한시호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디트로이트로 가서 여섯 번째 모험인 중국 음식 도매업을 정양필과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미국 대평원 지역 농장을 정리하고 안재창이 향한 곳은 미국 북부에 있는 도시 디트로이트였는데요. 디트로이트는 당시 미국 중공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고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1920년대 포효하는 미국 경제는 철 중공업 산지인 디트로이트를 자동차 산업 중심지로 만들었고, 미국은 자동차가 달릴 포장된 도로와 정류소별로 전국 풍경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시간당 최고 임금을 지급하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여 기술공이 되려고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정양필과 안재창의 성을 딴 정안회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저소득층 노동자들을 상대로 새로운 음식업인 중국음식 도매업을 창출해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는 ‘찹수이(Chop Suey)’라는 중국 음식이 점점 인기를 얻고 시작했습니다. 찹수이는 중국 사람들이 미국인 입맛에 맞게 국수를 기름에 튀기고 각종 야채와 고기를 볶아서 국수 위에 얹은 음식이었습니다.
20세기 들어 찹수이가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자 미국 큰 도시의 중국인 거리에 찹수이 하우스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는데요. 한인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당시 찹수이가 미국 중류 사회로 급속하게 보급됐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중국에 없는 잡채라는 음식을 찹수이라고 부르며 포효하는 미국 경제와 미국 남부로부터 전국에 퍼져나가는 흑인의 유행 음악 재즈와 함께 찹수이는 저소득층 음식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류 사회에서 전국 중류 사회로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찹수이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안재창과 조오흥, 그리고 정양필은 1922년 정안회사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안재창은 그의 생애 일곱 번째 모험으로 중국 음식 도매업에 도전했습니다.
안재창은 당시 정안회사를 처음 시작할 때 힘들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낭독: 안재창] 정양필 씨 사저에서 하루에 한두 갤런을 만들어 양철통에 담아 가지고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다니며 5, 6 마일을 다닐 때 잘해야 한 사람 품값이나 일일 숙식비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든든한 의지와 근면한 사역, 그리고 민활한 수단으로 반년 만에 하루에 수십 갤론을 주문하는 고객이 있어서 매달 1천 달러 이상 수입이 있었다.
여기서 찹수이를 대량 주문했던 고객은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큰 제이엘헛슨 백화점의 음식부였습니다.
많은 미국인은 찹수이 식당에 가지 않아도 백화점 음식부에서 찹수이를 먹을 수 있게 돼 크게 만족해했습니다. 이렇게 중국 음식업계에서 정안회사가 개발한 도매방식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정안회사는 1년 만에 3만5000 달러에 달하는 매상을 올렸습니다. 이는 당시 한인 회사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믿기 힘든 성공담이었습니다.
이들이 고안한 새로운 사업인 ‘찹수이 도매업’은 정안회사 창업자들이 고안해 낸 새로운 사업이었고 새로운 시장, 즉 개인이 아닌 기관, 단체들을 고객으로 개척했던 사업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음식업계뿐만 아니라 요식업계에서도 혁명이었습니다.
한편 찹수이 도매업으로 디트로이트에서 자리 잡은 정안회사는 새로 소매업에도 진출했습니다.
한인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정안회사가 크게 다섯 가지 판로를 개척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정안회사의 시장은 크게 도매업과 소매업으로 나뉘어지는데 다섯 가지 판매로를 개척했던 것입니다. 첫째는 노동자들이 퇴근하면서 종이상자에 중국 음식을 담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전화로 주문하여 주문자가 찾아가거나 정안회사에서 배달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단체, 또는 그룹 모임에 주문을 받아 배달하는 케이터링 소매업이었습니다. 넷째는 백화점, 학교, 구내식당 등이 있는 기관에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메뉴를 바꿔가면서 배달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소규모 간이 식당에 배달하는 도매 판매업이었던 것입니다.”
정안회사는 1925년 2월 7일 미시간주 정부에 주식회사로 등록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그 목적으로 미국 음식, 중국 음식과 음식 재료를 제조해 도매 또는 소매하기 위해서라고 쓰여 있습니다.
안재창이 동업자들과 설립한 정안회사는 나름 눈에 띄는 방식으로 운영됐는데요. 한인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런 운영 방식이 정안회사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정안회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원활한 소비자와의 소통이었는데, 첫째는 배달하는 직원이 소비자에게 지난번 배달한 음식에 대한 알아보게 하고 동시에 새로 개발한 음식을 소개하여 주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장 조사와 메뉴 개발을 끊임없이 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중국 음식 도매업이 필생의 사업으로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각자의 전문적인 기능을 갖췄던 것입니다. 셋째는 1910년대 네브래스카에서부터 가까운 친척같이 쌓인 끈끈한 인연으로 안채창은 경험이 많은 어른으로, 젊은 정양필과 정양홍은 집안 조카로 유창한 영어로 경영과 홍보를 맞아 성심껏 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안회사의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929년 미국을 덮친 경제대공황으로 디트로이트 경제가 타격을 받으면서 찹수이 도매업에 나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후 정안회사는 찹수이 도매업보다는 소매업에 집중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는데요.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친 뒤 마침내 1951년 4월 해체를 신고하고 회사 시설과 고객을 매각했습니다.
‘인물로 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안재창’ 5편으로 안재창이 설립한 정안회사의 흥기와 쇠퇴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